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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쪽은 클린트. 인사해라, 토니."
고개를 돌려서 이쪽을 보는 남자아이의 얼굴은 인형같았다. 클린트는 여전히 그 얼굴을 사진을 보듯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솜털같이 보드라운 연한 금색의 머리카락 아래로 깜빡이는 눈동자는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크고 예뻤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이 나풀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하지만 그 예쁜 얼굴은 가슴아프게도 나이에는 걸맞지 않는 냉랭한 무표정이어서, 눈칫밥이라면 나이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많이 먹어봤던 클린트는 곧바로 저 애가 자신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는걸 알 수 있었다. 남자아이는 무표정하게 클린트를 응시하면서 몇번 눈을 깜빡이고는 곧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뒤에 선 '아저씨'가 그러면 안된다며 몇 마디 잔소리를 했지만 클린트는 사실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가 원래 있던 곳에서 텃세나 견제, 서로 미워하고 미움받는건 숨쉬는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애정에 굶주린 아이들은 구덩이에 갇힌 들개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공격했다. 한 명이라도 탈락하면 입에 들어올 고깃점이 좀 더 커질 것처럼. 클린트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토니의 옆에 앉았지만 토니는 클린트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클린트는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이 저택에 발을 들이고나서부터 쭉 들려왔던 고급스러운 억양에 스스로의 거친 억양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클린트 프랜시스 바튼. 잘 부탁합니다." 토니는 대꾸하지 않았다. 장난감 로봇을 쥐고 있던 손에 더 단단히 힘을 주었을 뿐이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연달아 같은 간격으로 짧게 세 번. 내용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클린트는 턱을 괴고 있던 팔을 풀고 창틀 아래로 내려섰다. 창가에서 방 안쪽으로 몸을 돌리자 순간적으로 시야가 캄캄해진다. 손가락을 끼워 접어뒀던 책 표지를 잠시 아쉬운 듯 내려다보다가 클린트는 책을 펴 읽던 페이지를 확인하고 책을 덮었다. 482페이지. 페이지 번호는 기억하겠지만 다시 이 책을 펴보는건 언제가 될지 모른다. 아니, 행여 이 책을 다시 보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같은 책은 아니리라. 책의 마지막 문장이 눈 안쪽으로 떨어지듯 박혔다. 책을 제자리에 도로 꽂아넣고 소파 위에 걸쳐뒀던 코트를 집어들어 팔을 꿰었다. 방문을 닫기 직전에 클린트는 다시 한번 방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손에 든 가방은 그와 상관 없는 것들로만 채웠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전부 이 방에 있었다. 가져가지 않을 것이기에 남겨두는 것이지만 미련은 남았다. 잠시 고민했다. 한 가지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문턱에 서서 곧 안으로 되돌아갈듯했던 다리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전부 가져가지 않을 거라면 가져가지 않는 편이 나았다. 물건도, 추억도, 감정도.
계단을 내려간다. 저택의 현관문을 나서서 정문에 닿기까지 세 명 정도와 마주쳤고 그때마다 클린트는 가벼운 수인사나 눈인사로 접근을 막고 걸었다. 그다지 속도를 높여서 걸을 필요는 없었다. 괜히 눈에 띌 짓을 해서 좋을 일은 없다. 그 때문에 가방 역시 크지 않은 것으로 준비하느라 옷조차 몇 벌 넣지 못했다. 정문을 지키던 가드에게 짤막한 인사를 건네고 정문을 나서는 순간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클린트는 일순 고민했지만 곧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어디 가] 목소리가 들리는듯한 퉁명스럽고 짧은 메시지였다. 클린트는 몸을 돌렸다. 저택의 4층, 토니의 방 창문 안쪽에 서 있는 그가 보였다.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를 하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번 울리기 전에 끊어졌다. [메시지로 하라고 했잖아.] 클린트는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화면이 잘 안 보여서요. 리즈를 백화점에 데려다 주기로 했습니다. 쇼핑도 따라가기로 해서 오늘 늦을 겁니다.] 그들 사이에서 몇 번이고 반복된 대화였다. 그는 텍스트 메시지를 보내고, 클린트는 전화를 건다. 그는 짜증을 내면서 받고, 클린트는 웃으며 말한다. 죄송합니다. 화면이 잘 안 보여서요. [비위도 좋네. 붙어먹는 놈 약혼녀 쇼핑 수발까지 들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급작스레 목이 메였다. 공황장애라도 생긴것마냥 목이 턱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아마 눈 앞에 있었더라면 속일 수 없었을 테지만 토니는 저처럼 원시가 아니었기에 이 거리에서 표정을 들킬 일은 없었다. 클린트는 일그러진 표정은 포기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기로 했다. [제 친구기도 하니까요. 다녀오겠습니다.] 전화는 대답도 없이 끊겼다.
손에 들었던 백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 걷는다. 감시카메라에 찍히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클린트는 왼손목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 바닥에 떨어트리고 세게 밟았다. 작은 소음과 함께 박살난 시계에서 녹색의 판넬만을 끄집어내서는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과 함께 쥐고 큰길가로 다가간다. 건널목에 신호대기로 서 있는 차를 보고 클린트는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운전석에 탄 체격 좋은 남자가 클린트를 알아보고는 반갑게 알은척을 해왔다. 차가 서행해서 다가왔다. "어디 가나?" "백화점이요. 마셜씨는?" "낚싯대 좀 보러. 시내까지 태워줄까?" "그럼 고맙죠." 조수석에 올라탄 클린트는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마셜의 주의가 잠시 다른 데 팔린 틈을 타 뒷좌석과 앞좌석 사이의 좁은 틈에 손을 넣어 쥐고 있던 것들을 밀어넣었다. 휴대폰은 무음으로 해두었으니 누가 찾아내기 전까지 마셜씨가 발견할 일은 없을 터였다.
차가 시내로 진입하자 클린트는 재빠르게 감사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시내 권역까지도 그다지 안전한 지역은 아니었기에 클린트는 주의 깊게 걸었다. 시내의 감시카메라들은 그의 눈이나 다름없었다. 백화점에 들어서는 모습까지는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백화점으로 들어선 클린트는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가방에 들어있던 옷을 꺼내 갈아입고 캡모자를 푹 눌러쓴 다음 가방을 뒤집자 색이 다른 안쪽 면이 나왔다. 입고 있던 옷가지를 가방에 쑤셔넣고 가방은 한 손에 들었다. 그대로 백화점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시간은 짧을 수록 좋았다.
공항까지는 버스를 탔다. 지하철을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지하철 역과 차량 내부의 cctv가 마음에 걸렸다. 기록을 남길 수밖에 없다면 적은 편이 좋다. 버스에 설치된 cctv는 많아봐야 두 대 정도다. 클린트는 버스를 세 번 갈아타면서 공항에 도착했다. 쓸데없이 목격자와 기록을 늘리는 데서 오는 리스크보다는 추적시간을 늘리는 데서 오는 메리트가 더 크다고 판단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그는 다시 한번 옷을 갈아입었다. 모자는 버리고 가방에 넣어뒀던 헤어스프레이로 머리 색을 바꿨다. 초고화질 cctv라면 걸리겠지만 임시방편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끼고 클린트는 약속했던 장소로 향했다. 17번 게이트 옆. 훌쩍 마른 여자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클린트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벤자민." 여자가 돌아섰다. "클린트." 그녀는 클린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힘없이 웃었다. "전혀 못 알아보겠네. 다른 사람 같아." 너도 그렇다는 말은 삼켰다. 확연히 마른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묵직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은 푸르스름한 기가 돌았다. 클린트는 잠시 머뭇대다 손을 올려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까칠하고, 홀쭉했다. 말없이 어깨를 끌어당기자 저항 없이 딸려왔다. 마른 어깨는 기억보다도 훨씬 가냘펐다. 등 뒤로 팔을 둘러 끌어안자 그녀는 클린트의 어깨에 소리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마음이 착잡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어깨가 뜨끈하게 젖어들어가도록 울음소리 하나 나지 않는것이 못내 안쓰럽고 아팠다. 습관이 될 정도로 내내 소리죽여 울었을 그 모습이 꼭 저같아서.
티켓팅엔 선불 신용카드를 사용했다. 비행기 티켓을 현금으로 결재한다면 직원의 기억에 남게 될지도 모른다. 클린트가 티켓팅에 사용한 선불 신용카드는 오늘의 계획이 구체화됐던 때에 만들어 간직하던 것이었다. 수고비를 쥐어주고 구한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을 구하게 하는 식으로 몇 단계를 거쳐 노숙자의 명의를 사용했다. 추적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쉽지도 않을 것이다. 클린트는 벤자민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고 싶어?" 벤자민은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넋을 놓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따듯한 곳이면 좋을 것 같아. 따듯한 데로 가고 싶어." 벤자민은 추워보였다. 클린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선지는 마이애미가 되었다.
직원에게 행선지를 이야기하고 결재를 기다리는 도중에 불쑥 벤자민이 입을 열었다. 작은 목소리는 공항의 소음에 쉽게 묻혔다. 클린트는 반문했다. "응?" 그녀가 반복했다. "정말 괜찮겠냐고." 벤자민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직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티켓을 내밀었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클린트는 티켓을 받아들었다. 돌아올 예정은 전혀 없었지만 티켓은 왕복이었다. 추적이 들어온다면 분명 편도티켓을 먼저 조회해볼 것이기에. 클린트는 티켓을 받아들고 벤자민의 손을 잡아 대기열에서 벗어났다.
사람이 적은 공항 구석으로 이동해 비어있는 벤치를 발견한 클린트는 벤자민을 앉히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양 뺨을 감싸 자신을 보게 하자 흐릿한 갈색의 눈동자가 흔들리는게 보였다. 클린트는 마음을 다잡고 가능한 한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벤자민, 괜찮아. 난 정말로 괜찮아." 벤자민은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클린트의 손을 잡아왔다.
"무서워, 클린트.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정말로 그러고 싶어?"
벤자민은 하염없이 클린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참만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손 끝이 가볍게 경련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그치만 네가 걱정돼. 너는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틀림없이 그 사람…." "그 얘긴 그만 하기로 했잖아. 일어나, 벤자민. 출발하기 전에 뭐라도 먹는게 좋겠어." 그녀는 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쉽사리 딸려왔다. 클린트는 몇달새 뼈만 남을 정도로 가느다래진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고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곧 인파 속에 묻혔다.
***
휴대폰 화면이 켜지며 진동이 울렸다. 토니는 액정에 뜬 이름을 내려다보았다. [Elizabeth linton]. 표정이 저절로 구겨진다. 토니는 통화 거절 버튼을 누르고 텍스트 메시지를 작성했다. [용건 있으면 메시지로 하라고 했잖아] 답 메시지는 10분이 훌쩍 넘게 지나서야 돌아왔다. 하기야, 그 관리받는 긴 손톱으로는 메시지를 작성하는게 퍽이나 어려울 것이다.
[뭐 하고 있어? 심심해 같이 쇼핑이나 하러 가 아님 개라도 좀 보내던지]
메시지를 확인한 토니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어디냐고 메시지를 작성하는 대신 토니는 전화를 걸었다. 여자에게서 답이 오길 기다리느니 전화가 나았다. 여자는 전화를 받고는 왠일로 전화를 다 거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토니는 그녀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야." [난 집에 있지. 세상에, 당신한테 전화를 다 받아보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나 쇼핑 가고 싶은데, 나랑 같이….] 토니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02. 토니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으나 그가 추적할 수 있었던 건 백화점에 들어가는 클린트의 모습이 찍힌 cctv 영상까지였다. GPS는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장소를 띄웠다. 신호를 좇아 합법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좋은 이웃인 마셜씨의 차를 열고 클린트가 버리고 간 게 확실한 박살난 시계와 휴대폰을 발견한 토니는 이를 갈았다. 박살난 손목시계는 토니가 직접 손을 봐 위치추적기를 내장한 물건으로, 클린트와 20년을 함께 지내면서 토니가 그에게 자의로 선물했던 유일한 물건이었다. 클린트는 제 손보다 그 시계를 아꼈다. 받고 한달정도는 기스가 날까 저어해 서랍에만 넣어두고 다녔을 정도로. 토니는 그 시계를 굳이 박살내 찾을 수 있는 곳에 두고 간 것이 일종의 메시지임을 알았다. 그것은 클린트의 작별인사였다. 눈에 보이게 만들어두지 않았다면 토니가 들으려 했을 일은 절대로 없었을 메시지. 20년동안 뒷세계에 반쯤 몸을 걸치고 있던 사람답게 클린트의 잠적은 깨끗했다. 클린트는 초겨울의 어느 날에 토니의 인생에 느닷없이 뛰어들어왔던 것처럼 뜬금없이 사라졌다. 클린트가 생활했던 방이 아니었다면 아마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로.
토니는 3주정도는 악에 받쳐 클린트를 찾아댔지만 결국은 그가 언제나 그랬듯이 흥미를 잃었다. 주인을 몰라보고 집을 나간 개보다 주인이 더 마음을 졸이다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20년이나 기른 개였기에 다른때보다 좀 더 감상적이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3일정도 추스릴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늘어져 있었다. 분명히 4층의 자기 방에 있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면 클린트의 방에 앉아있는 경험을 몇 번 하고나자 토니는 매우 불쾌해졌다. 그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시켜 클린트의 방문에 못질을 하게 했다. 그리고 술과 여자, 마약과 담배가 있는 장소로 돌아갔다. 언제나 그래왔듯 그곳이 토니에게 어울리는 자리였다.
03. 3개월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다. 클린트는 한동안 사냥터에 나온 사냥개같은 삶을 살았다. 3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스타크가 그들을 쫓지 않고 있음을 확신했다. 벤자민은 묵묵히 곧잘 따라왔지만, 출발했을 때 나빴던 안색은 좀체로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는 벤자민에게는 정착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클린트는 마이애미의 한 휴양지에서 에어컨 설치 및 AS를 담당하는 기사로 취직했다. 급여는 형편없었지만 상관없었다. 클린트는 주행거리가 20만km가 넘는 주황색의 낡은 닷지 픽업트럭을 몰았다. 에어컨을 틀면 오른쪽 와이퍼가 작동했고 클락션을 울리고 싶으면 비상등 버튼을 눌러야 했다. 그나마 히터를 필요로 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게 다행이었다. 히터를 틀면 에어컨이 나왔다. 히터를 트는 방법은 찾아내지 못했다. 정상적으로라면 거래할 수 없는 상태의 차였지만 클린트는 그 닷지가 마음에 들었다. 그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클린트가 차를 마음에 들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중고차 딜러는 재빨리 선심쓰듯 그의 몫에서 150달러를 깎아주겠다고 했다. 클린트는 그가 자신에게 바가지를 씌운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부른대로 값을 지불했다. 그의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차였다. 색이 바래고 칠이 군데군데 상한 차에 올라타 세월과 이름모를 누군가의 인생이 뒤섞인 냄새를 맡고 있으면 그가 클린트 바튼이 아닌, 태어나서부터 이 동네에서 이 닷지를 몰고 에어컨을 설치하고 때론 고쳐온 누군가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클린트는 기름때가 잔뜩 묻은 면바지와 주름이 잔뜩 지고 땀에 전 린넨 셔츠를 입고 일했다. 손톱 밑에 늘 기름때가 끼어서 손을 씻어도 기름 냄새가 났다. 3개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었다. 비록 누군가의 부속물 취급을 받았을지언정 클린트는 대학교를 졸업했고 지내던 집에서는 제 양말 한 켤레 직접 세탁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삶은 생소했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클린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은 늘 단 하나였고, 그건 아주 멀리 있었다.
클린트는 벤자민을 위해 작은 집을 빌렸다. 내부의 수리와 개조는 전부 직접 했다. 벤자민은 집의 수리가 끝날때까지 근처의 호스텔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낮시간동안 에어컨을 틀면 와이퍼가 움직이는 닷지 안에서 땀으로 절여지며 열두시간의 외근을 마치고 나면 클린트는 호스텔에 들러 간단한 샤워를 하고 집을 수리하러 갔다. 벤자민은 낮동안은 호스텔에 머물다가 클린트가 집을 수리하러 나서면 따라나섰다. 이제는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불러온 배 탓에 일을 거들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클린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클린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클린트는 집안을 수리하면서도 짬이 나면 한번씩 고개를 돌려 벤자민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은 이전보다 밝아진듯 했지만 마이애미의 강렬한 햇볕 아래서도 벤자민의 얼굴엔 좀처럼 핏기가 돌지 않았다. 불안감이 자꾸만 말을 부추겨 클린트는 수다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클린트는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는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 섞이고, 선후관계가 뒤집히고, 이따금 희망사항과 객관적 사실이 뒤바뀌기도 했다. 객관적으로 클린트는 형편없는 화자였지만 벤자민은 소리없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같은 과거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두 사람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벤자민은 그들이 함께 대학에 다닐 때의 이야기를 했다. 클린트는 풀밭에서 술내기를 했을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둘이 기억하는 버전이 달라 한동안 입씨름을 했다. 결말은 계절 배경이 엇갈리면서 각자 다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걸로 마무리지어졌다. 기숙사 전통이라며 입사 첫날 자정에 선배들이 습격했던 이야기를 했을 때는 한 명만 웃었다. 클린트는 기숙사에 들어갔던 적이 없었다. 성적 탓은 아니었다.
두사람 다 의도적으로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피했다. 사실상 그들 사이의 가장 큰 공통분모는 같은 대학도, 한 도시에서 살아온 시간도 아닌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동시에 한 사람을 사랑했고, 같은 사람에게서 같은 상처를 받았다. 태어난 지역과 성별, 읽었던 책과 좋아했던 음식에 상관 없이 클린트와 벤자민이 함께 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이었다.
04. 토니는 이따금 백화점 정문으로 클린트가 들어가는 CCTV 영상을 꺼내 돌려보곤 했다. 담뱃가루가 입에 들어간 것 처럼 입맛이 깔깔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가진 것이 지나치게 많은 남자는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건 도망친 개에 대한 집착이 아닌, 손을 댄 문제를 풀지 못한 것에 대한 오기였다. 들어간 사람만 있고 나온 사람이 없을 리는 만무했으니 나오는 사람들 중에 클린트가 있으리라는건 확실했지만 하루동안 백화점에 출입한 사람은 끔찍하도록 많았다. 백화점의 출입구가 4곳이라는걸 감안하면 클린트가 들어간 시간부터 단순계산해도 40시간 분량의 폐쇄회로 기록을 정밀분석해야했다. 토니는 팔짱을 끼고 턱을 문질렀다. 혼자서 저 기록을 다 분석하는 건 무리였다. 좀 더 정밀하고 믿을만한 어시스턴트가 필요했다. 토니는 십대 후반에 설계했던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떠올렸다. 하워드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자 토니가 기계와 프로그램에 몰두하는 것에 대해 터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05. 집 수리가 끝났다. 부엌 벽은 벤자민이 마음에 들어했던 모자이크 타일을 두 줄로 둘렀다. 거실 벽은 흰 색으로 칠하고 사포질을 해 마감한 위에 벤자민이 그림을 그렸다. 연보라색의 숲에 민트색의 토끼와 분홍색의 기린이 걸었다. 벤자민은 눈을 찡그리며 손끝이 무뎌졌다고 말했다. 클린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그림은 7개월 전처럼 여전히 포근하고 달콤했다. 현실에 없을 그림은 몽환적이었다. 볼 때마다 멍해지는 감각은 오히려 현실을 일깨운다. 클린트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보았지만 그의 말재간으로는 가슴 한켠이 간질간질한 감각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한참을 고민하며 끙끙대다가 겨우 꺼내놓은 말이 '예뻐서 좋다' 였다. 벤자민은 웃으며 클린트의 코를 가볍게 꼬집었다. 클린트는 벌개진 코 끝을 쓸었다. 여전히 가슴 한 켠이 간질간질했다.
벤자민의 방 벽은 민트색으로 칠했다. 시판되는 페인트 중에는 그녀의 마음에 드는 색이 없었다. 클린트는 녹색 페인트와 흰색 페인트를 사와 직접 섞었다. 벤자민은 냄새가 닿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두고 높은 의자 위에 앉아 클린트가 섞는 페인트 통을 내려다보며 색을 골랐다. 비율을 재어가며 색을 섞는 작업은 번거롭고 지루했지만 페인트가 마르고 나자 벤자민이 옳았다. 클린트는 딱히 좋아하는 색이 없었으므로 벤자민과 같은 색으로 자신의 방 벽을 칠했다. 화장실은 파란 색의 유리타일을 썼다. 빛을 받으면 푸르게 반짝였다. 거울은 새 것을 샀다. 여자가 있는 집인데 거울마저 남이 쓰던 것을 쓰라기 미안했다. 선반은 클린트가 만들었다. 연한 색의 체리목으로 짠 선반엔 방수처리만 하고 페인트를 입히지 않았다. 만들어놓았을때는 예뻐서 그렇게 했는데 파란 타일로 마감된 화장실 안에 가져다놓자 영 어울리질 않았다. 어떻게든 해 보자고 일단 벽에 걸어보았다. 벤자민이 보고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귀끝이 달아올랐지만 따로 칠을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벤자민은 화장실에서 선반을 볼 때마다 웃었다. 화장실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클린트는 새로 칠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낡은 집 안의 가구들은 새 것이 거의 없었지만 좋았다. 재활용센터를 돌며 벤자민이 고르고 클린트가 리폼했다. 표면이 울퉁불퉁한 탁자와 왼쪽 다리가 기운 안락의자를 사서 표면에 사포질을 하고 나뭇조각을 덧대어 고친 후 래커칠을 하고 벤자민이 좋아하는 민트색 페인트를 칠해 그늘에서 말렸다. 클린트는 자신이 무언가를 고치고 수리하는데 재능이 있는 걸 28년만에 처음 알았다. 그 전에는 쓰던 가구가 기울거나 흠이 나면 바로 새 것으로 바뀌는 곳에서 살았다. 클린트는 무엇이든 그렇게 쉽게 버린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흠을 발견하면 그가 고치거나 손보려고 시도하기도 전에 새로운 것이 원래 거기 있었던 양 전의 것을 밀어내고 들어왔다. 그렇게 쉽게 버려지고 교체되는 물건들은 언제든 그도 그럴 수 있다는 현실을 일깨웠다. 처음으로 직접 샀던 낡은 책을 소각장에서 발견한 이후로는 사용하던 것에 흠이 나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원래 책이 꽂혀있던 자리에는 제목만 같은 다른 책이 꽂혀 있었다. 페이지를 접었던 자국이나 마른 코피얼룩이 없는 새 책이었다. 클린트는 그 책을 소각로에 같이 넣었다.
그 이후로 그는 주변의 흠을 숨겼다. 책상에 흠집이 나면 책을 올려 가렸다. 의자의 다리가 기울면 벽에 붙여 세워두었다. 작은 물건들은 책상 제일 아랫서랍으로 들어갔다. 서랍의 문은 잠그고 열쇠는 가지고 다녔다. 지금은 전부 거기에 두고 왔다. 열쇠도.
작은 3단 서랍장은 집을 수리하는 동안 누군가가 버리려 길가에 내놓은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서랍장을 모두 빼버리고 안팎에 흰색 페인트를 칠해 거실 벽에 걸었다. 안쪽에 꽃병과 작은 동물 인형을 올려두자 근사한 벽감이나 입체 액자처럼 보였다. 벤자민의 손을 끌어 보여주자 알 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배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다. 햇빛 아래 드러난 실루엣은 여전히 가냘펐다.
이사온 첫날에는 방에 칠한 페인트가 마르지 않아 거실에서 함께 잠을 잤다. 거실에 놓은 쇼파에 담요를 겹쳐 깔아 벤자민의 잠자리를 준비했다. 그 아래 침낭을 펼쳐 놓자 잠자리 준비가 끝났다. 불을 끄고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어둠 속에서 서로의 숨소리만 듣고 있었다. 테라스 창으로 보이는 밤하늘은 별로 가득했다.
클린트. 어둠 속에서 벤자민의 손이 뻗어나와 쇼파 아래쪽을 더듬었다. 어둠에 익은 눈에 벤자민의 창백한 손은 잘 보였다. 클린트는 약간 망설이다 손을 뻗어 벤자민의 손을 잡았다. 말랐지만 따듯했다.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이렇게 같이 있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잖아. 태연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았지만 애써 밝게 낸 목소리는 떨리고 울음기도 섞여 있었다. 클린트는 모른 척 해 주기로 했다. 대답 대신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잡았다. 한참만에 그녀가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잘 지내고 있을까? 클린트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답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린트는 그녀의 손을 모포 속으로 밀어넣어 주었다. 잠 없는 꿈이 이어졌다. 어스름 속에서 민트색 토끼와 분홍 기린이 걸었다.
06. 처음에는 쇼파가 있었다. 하지만 3주 정도가 흐르고 벤자민과 클린트 둘 다 쇼파를 창고로 치우는데 동의했다. 쇼파를 치운 자리에 그들은 넓은 카펫을 깔았다. 집을 꾸미면서 유일하게 사치를 부린 부분이었다. 태피스트리처럼 복잡다양한 문양이 들어가있는 푹신한 카펫을 골랐다. 벤자민은 그 카펫의 색감과 패턴을 사랑했다.
날이 저물면 클린트와 벤자민은 카펫 위에 함께 누웠다. 벤자민은 배에 손을 얹고 태동을 감상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클린트는 읽던 책을 엎어두고 그녀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배에 귀를 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자격을 가진 사람은 따로 있었기에 그는 그저 그녀의 배에 가끔 손만 얹어보곤 했다.
이따금 그는 벤자민이 뱃속의 아이에 대해 가지고 있을 감정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보았다. 벤자민은 아이에 대해 직접적인 감정표현을 별로 하지 않았다. 대화는 많았지만 잘못 던진 공처럼 어떤 주제는 바구니 밖으로 툭툭 굴러나갔다. 도로 주워 던질 수는 없었다. 그건 규칙 위반이었다.
배에 얹은 손으로 진동이 느껴졌다. 아이가 툭툭 걷어차듯 움직이는 기색을 느낄 때마다 클린트는 선생님 앞에 선 아이같은 기분을 느꼈다. 괜스리 의기소침해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떨 때는 코끝이 찡하니 맵기도 했다.
클린트는 벤자민의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마이애미에 왔을 때보다 더 색이 엷고 흐릿했다. 후회하진 않느냐는 한 마디를 꺼내는게 참 어려웠다.
07. 하늘은 회색이었다. 점점이 눈발이 날렸다. 오베디아는 차에서 내렸다. 기사가 황급히 따라내려 우산을 펴드는걸 손짓으로 만류해 차에 남게 했다. 오베디아는 속으로 토니를 욕했다. 한창 나이에 벗겨진 머리는 추위에 약했다. 비보다는 나았지만 눈도 나쁘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날씨에 한번정도 외부인이 실내의 차고를 이용하게 해 준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을. 그의 대자는 독보적인 천재성만큼이나 괴팍했다. [방문하신다고요? 주차는 외부에 하세요.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시겠지만.] 자기 용건만 냉담하게 전하고 끊어진 좀전의 통화를 생각하자 머리에 다시 열이 올랐다. 오베디아는 코트 깃을 돋우고 어깨를 움츠린 채 걸었다.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검게 웅크린 저택의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발 아래로 정원의 돌길이 젖어들어갔다. 초겨울의 진눈깨비는 쌓이기 전에 녹았다. 오베디아는 현관 앞에 도착해서야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가 이 저택에 출입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입가의 수염이 씰룩거렸다. 애송이. 오베디아는 경멸을 섞어 냉소했다. 마음 속으로만.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상대를 소리내어 욕하는 건 권장할만한 모험은 아니었다. 오베디아는 차임벨을 눌렀다. 잠깐 사이에 젖어든 어깨에서 냉기가 몸으로 스며들었다. 문은 마음 속으로 날씨와 토니에 대해 점잖지 못한 어휘들로 저주를 퍼부을 만큼 그를 문 앞에 세워둔 후에야 열렸다. 마중을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호감인 손님을 어떻게 대하면 좋은지 교본을 만들어도 될 듯한 손님맞이였다.
응접실까지 통하는 복도는 어둡고 추웠다. 컴컴한 동굴같은 복도는 괴물이나 짐승의 입 안을 연상시켰다. 오베디아는 어둡고 습기찬 복도를 따라 걸었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서느런 손가락이 등골을 더듬어 내려가는듯한 감각이었다. 오베디아는 속으로 혀를 차며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벽난로가에 앉아있던 토니가 뒤돌아보았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구나."
토니는 미소를 지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싸가지없는 애송이. 오베디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토니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서류철을 열고 안에 든 서류를 건넨다. 토니가 서류를 받아들어 넘기는 시늉을 했다.
"이걸로 끝입니까?"
서류를 덮고 토니가 물었다. 오베디아는 호인같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토니는 오베디아를 응시하다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오베디아는 불편함을 느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귀염성이라고는 없는 애송이 같으니라고. 토니는 오베디아가 감질낼 만큼 시간을 들여 서류를 한줄한줄 신중히 읽어내려갔다. 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방법은 그가 가르친 것이었지만 그 상대가 되는건 달갑지 않았다. 토니는 서류를 다 읽고도 한동안 뜸을 들이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오베디아는 토니가 꺼낸 만년필을 알아보았다. 토니가 하버드에 입학할 때 그가 선물한 것이다. 뚜껑 안쪽에 정교한 필기체로 [하버드 경영학과 입학을 축하하며 -O.S] 라고 새겨넣은 주문품이었다. 토니는 펜을 한바퀴 돌려보이고 미소지었다. “이거 기억하시죠? 아저씨가 주신 거에요. 다른 걸 여러 가지 써 봤지만 이것만한게 없더군요.” 정말로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부드러운 손길로 뚜껑을 열어 서류에 사인하는 토니를 보며 오베디아는 순간 진심으로 감동받은 것을 불쾌감 속에서 인정했다. 악의와 호의를 번갈아 보이며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기술 역시 그가 가르친 것이었다. 토니는 훌륭한 학생이었다. 하워드가 지나칠 정도로 토니를 몰아붙이게 만든 그 천재성은 단순히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베디아는 서류를 받아 서류철에 넣었다.
"아저씨가 알아서 잘 하셨겠죠. 믿을게요."
토니가 웃었다. 방금 전과는 판이하게 순진한 미소였다. 오베디아는 욕이 튀어나올뻔한 것을 참았다. 조금 긴장을 풀만하면 고문 변호사단과 감사단을 보내 사람을 쥐어짰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내색할 수도 없었다. 오베디아는 토니를 따라 웃었다. 왼쪽 눈밑살이 희미하게 씰룩거렸다.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결과를 기다리는 것만 남았지."
토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베디아의 시선이 토니를 따라 움직였다. 토니는 응접실 구석의 바에서 술병과 잔 두개를 내왔다. 오베디아는 잔을 받아들었다. 알콜이 들어가자 입이 조금 느슨해져 오베디아는 은근한 어조로 아까부터 신경쓰이던 것을 물었다.
"일하는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이는구나. 휴가라도 보낸 거냐?"
"내보냈어요. 집을 팔려고요."
오베디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당혹시키는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대자는 그 분야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진심이냐?"
"언제나 그랬듯이 완전히요."
"하지만 토니, 이 집은 하워드가 나고 자란 곳이야. 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이 집을 팔겠다고?"
"값은 별로 상관 없어요. 가능하면 빨리 처분하고 싶어요. 부지만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으면 더 좋겠네요. 철거비용은 제가 부담한다고 하세요."
"토니!!"
"저 귀 안 먹었어요. 그리고 조만간 말리부로 이사갈 거니까 놀러오세요. 다음달이면 공사가 끝나거든요. 집뜰이 선물은 필요 없어요."
"토니, 토니, 토니. 이런. 다시 생각해봐라. 하워드의 장례식이 끝난 지 두달도 안 됐어. 네가 상심한 건 잘 안다만…."
"전혀 상심하지 않았다는걸 모르신다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
"토니."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죠. 아무리 아저씨 말씀이라도 맘 바꿀 생각 없어요."
토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오베디아는 어쩔 수 없이 문을 나섰다. 현관 앞에서 그는 다시 한번 대자의 마음을 돌려보려 시도했지만 토니는 잘 가시란 인사 뒤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오베디아는 속으로 토니를 욕하며 저택을 나섰다. 하늘은 한층 더 짙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오베디아는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미고 걸음을 뗐다. 눈발이 거세졌다.
08. 낡은 픽업트럭을 주차시키고 클린트는 차에서 내려 조수석에 얹어두었던 갈색 봉투를 꺼냈다. 부스럭거리는 종이봉투는 우유와 달걀, 빵 몇 봉지와 양상추, 토마토, 가지같은 식료품으로 차 있었다. 양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일주일치 식료품 정도 될까. 차 문을 잠근 클린트는 부엌 계단을 올랐다. 발 아래의 계단이 삐그덕 소리를 냈다. 집을 수리할 때 새로 짓다시피 했지만 이렇게 놓친 부분이 간혹 있었다. 클린트는 시선을 내려 계단을 컨버스 끝으로 가볍게 눌러보았다. 휘기 시작하는 나무판 끄트머리로 튀어나온 못대가리가 보였다. 못은 녹이 슬어 있었다. 외벽까지 새로 칠을 한 집에 낡은 계단은 이질적인 그림을 그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을 되돌리는건 불가능하다. 애써 보수하고 고쳐봐도 세월에 부식된 특유의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기억들이 그렇듯이.
주말에는 계단을 새로 짜야겠다고 생각하며 클린트는 부엌쪽 문을 밀고 집에 들어섰다. 손에 든 봉투를 뒤적거려 본다. 그가 메모해간건 전부 샀지만 그녀가 부탁한 건 빠트린 게 있을 지도 모른다. 문제는 봐도 뭘 빠트렸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는 목소리를 높여 입을 열었다. "벤자민. 나 왔어. 사오라는 거 다 사왔는데 뭐 빠진 거 있나 와서 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클린트는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주방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은 조용했다. 시간이 죽은 듯한 기분나쁜 정적에 클린트는 주춤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클린트는 황급히 안방문을 열어젖혔다. 침대 아래쪽의 바닥에 만삭의 여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클린트는 다급히 그녀를 안아올렸다. "벤자민, 벤자민!!" 벤자민의 몸에서 멀지 않은 곳에 휴대폰이 떨어져 있었다. 911을 부르려다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클린트는 진정하려고 노력하며 그녀의 휴대폰으로 911에 전화를 걸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정신으로 911 구급대원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난 뒤 클린트는 구급차를 기다리며 벤자민의 어깨와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에게 가져본 적 없는 가족이었다. "죽지 마. 제발…." 의식하지 않은 말이 제멋대로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뭘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철들며 익혔던 대부분의 지식은 사람을 죽이는데 관련된 것이었지 살리는 게 아니었다. 응급조치를 해야 하는데. 머릿속에서 말이 빙글빙글 맴돌았지만 정작 몸은 손 끝 하나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구급대원들이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와 벤자민을 추스려 들것에 눕히는 걸 보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구급대원 한명이 클린트에게 다가왔다. "남편분 되십니까?" 클린트는 순간 뺨이라도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남편이냐고? "네, 네." 아니,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와 벤자민은. "맞아요. 제 아내는, 어떻습니까?" 단순히 서로를 사랑해서 성립하는 사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동승하시죠." 구급대원이 클린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유니폼 모자 아래의 주홍빛 머리카락이 돌아서며 클린트의 뺨을 가볍게 긁었다. 촉각이 시각보다 느리게 따라왔다. 클린트는 유령처럼 끌려갔다. 부유하는 해초가 된 것 같았다.
09. 유독 생생한 기억들이 있다. 가령 클린트에게는 토니와의 첫 만남이 그랬다. 그런 기억은 앨범에 끼워놓은 사진과도 같다. 책장에서 앨범을 빼내 먼지를 털고 커버를 열면 언제든 그 자리에 기억이 마주한다. 이따금 어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그 때로 돌아가듯 생생했다.
클린트는 벤자민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비행기 안에서, 모포 한 장을 나눠덮고 잠들었던 공항 대합실에서, 벽지가 누렇게 변하고 반쯤은 떨어져나간 낡은 호스텔의 객실에서 그들은 침묵에 질식할 사람들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의 경우 대화는 시작도 없이 시작해서 끝도 없이 끝났다. 말을 하고 듣는 행위는 수단이 아닌 목적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그가 저를 홀로 두지 않을 것이라는것을 확인해야 했다. 그들은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다. 점심 식사 메뉴, 택시기사의 불친절과 마이애미의 날씨 탓에 더이상 입지 못하게 된 옷 같은 것들. 대화는 이따금 제자리를 맴돌았다. 간혹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만을 했다. 단어와 음절. 분절된 맥락과 이어지지 않는 말들이 택시 안과 의류매장의 탈의실, 곰팡이 핀 벽지가 발린 호스텔의 방 안으로 범람했다.
어디서의 대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수리가 끝나가던 집에서였을지, 벤자민의 옷을 사기 위해 들어갔던 로드샵의 비좁고 더러운 탈의실에서였을지 혹은 하이재킹으로 얻어탔던 트럭의 뒷좌석에서였을지 확실하지 않다. 함께 지나온 대화와 장소가 너무 많았다. 벤자민이 말했고, 클린트는 들었다. 흐려지지 않는 어떤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상하게 선명한 기억이 있지 않아, 클린트? 냄새라도 맡을 수 있을 것 같이. 감각기관이 고장났다는 생각이 들 만큼 생생한 날것같은 기억. 그런 기억 없어, 클린트?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글쎄. 그냥 생각났어.
여름이었고, 나는 열 살이었어. 너무 더워서 하루종일 짜증나있던 기억이 나. 아침에 벨라랑 싸웠어. 벨라가 내 치마를 입었거든. 벗으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들은 척도 안 하고 나가버리는 바람에 다른 옷을 입어야했어. 아, 그 감색 플레어스커트. 내가 제일 좋아하던 옷이었는데. 왜 그런 거 있잖아. 어린 여자아이들 특유의 이상한 결벽증. 모르겠다고? 그런 게 있어. 정말 아끼던 옷인데 사이나쁜 손윗형제가 입은걸 본 순간 쳐다보기도 싫어지는 거. 나한텐 눈길도 안 주던 도도한 고양이가 내가 싫어하는 애한테 애교부리는걸 발견했을 때 느낄법한 배신감이랑 비슷한 거야. 음, 이해하기 더 어려워졌나? 미안해.
아무튼 그랬어. 아침식사는 더 최악이었지. 당근이 잔뜩 들어간 반숙 오믈렛이었어. 반숙만 아니었어도 좀 나았을텐데. 한 수저도 안 뜨겠다고 버티다가 아빠한테 뺨을 꼬집히고 어거지로 반쯤 먹다가 그대로 학교로 갔어. 그 날 등굣길에 팔에 흘러내리던 땀방울 감촉까지 생생하게 기억나. 신기하지.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서 묶었는데, 그냥 다 짜증났어. 숱이 적은 머리를 땋아놓은 빈약한 꼴도 맘에 안 들었고, 빨간 리본도 싫었어. 고개를 돌릴때마다 땋은 데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얼굴을 찌르는 것도 싫었어. 알다시피, 우리 아빠는 우리가 엄마없는 애라는걸 티내지 않으려고 매일 아침마다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손재주가 그렇게 좋은 분은 아니셨잖아. 그렇게 못 하시면 그냥 하나로 묶어서 보내도 되는데. 꼭 엄마가 해준것처럼 아침마다 머리를 어떻게든 만져서 보내려고 하셨었지. 아. 아빠 보고 싶다. ………미안해, 클린트.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맞다. 등교. 그래서 결국 다른 옷을 입었어. 그날 입었던 옷은 그려보라면 그릴 수도 있어. 분홍색, 연노랑색, 빨간 색이 들어간 체크무늬 플란넬 셔츠에 데님 멜빵 치마였어. 그래. 반팔. 소매 끝단이 이렇게 한 단 접히는 거 말야. 어깨에는 장식이 있었고. 치마는… 아, 맞아. 색 진한 거 말고, 워싱된 연청색 멜빵 스커트.
시작이 나쁘면 전부 나쁘다고, 그날 하루종일 엉망이었어. 에세이는 집에 두고 왔고, 정말 집에 두고왔다고 말했다가 미세스 브라운한테 거짓말한다고 혼났지. 기억나? 맨날 아래 위로 갈색 옷만 입던 선생님. 가르치시던 과목이 뭐였더라. 참 이상하네. 그 선생님 뿔테안경은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과목이 생각이 안 나다니. 우리 기억이란 이렇게나 얄팍하고 덧없어, 클린트.
치마가 너무 덥고 답답했어. 걸을 때마다 아랫단에 허벅지 뒤쪽이 쓸려서 따갑고 쓰라렸어. 나중에 집에 가서 봤더니 부어 있더라. 우리 아빤, 오. 아빠가 노력하셨다는건 인정하지만 점수를 매기자면 빵점에 가까웠어. 그 데님 스커트가 겨울옷이라는걸 옷이 작아져서 버릴 때까지도 모르셨거든.
수학 쪽지시험은 열문제중 두문제 맞았고, 점심메뉴는 베트남 전병 튀김이었어. 그래, 그거. 애들이 뭐라고 불렀더라? 기름 전병? 기름 튀김? 뭘 넣은 건진 모르지만 입에 넣으면 묵은 기름맛밖에 안 나던 그거 말야. 맞아. 이따금 속에 정체모를 채소 대신 단팥이 들어있던 적도 있었잖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단팥은 채소보다 백배는 끔찍했어. 메뉴를 보니 점심 먹을 생각이 안 들어서 매점으로 갔었지. 우유를 한 팩 샀는데, 입구를 찢어서 빨대를 꽂고 한 모금 빨아올리는 순간 계단에서 발이 미끄러져 굴러 떨어졌어. 세 계단밖에 안 됐었으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치마를 입고 있었던 바람에. 무슨 꼴이었을지 짐작이 가지? 당연히 우유는 전부 엎질러졌고.
복도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왼쪽 손바닥이 너무 쓰라려서 무심코 손을 들어보니 피가 나고 있더라. 많이 다친 것도 아니었어. 그냥 살짝 긁혀서 피가 맺혔던 거였는데, 이상하게도 그걸 본 순간 눈물이 왈칵 났어.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엎드려서 대성통곡을 했어. 내 울음소리를 듣고 애들이랑 선생님이 달려와 날 일으켜세울 때 까지.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그렇게 울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거야. 그 전까지는 이를 악물고 물에 젖은 고양이처럼 온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으려고 했지. 온 세상이 내 적인 양. 왜 그랬을까? 아이들의 생각은 어른들과 다른 시간을 흘러가. 스물 여섯 살의 벤자민은 열 살의 벤자민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리고 한해 한해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열 살의 꼬마 벤자민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되겠지. 끝없이 반대방향으로 달려나가 멀어지는 기차처럼. 그 때의 나를 만나서 물어보고 싶어. 왜 그렇게 절박했던지. 다른 애들 눈에는 그 애가 어떻게 보였을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더라. 아, 그래. 조퇴를 하고 집에 갔어. 눈물이 안 멈췄어. 엄마가 떠난 이후 울지 않고 참았던 걸 한번에 몰아서 운다는 느낌이었어. 의자를 끌어다 벽장 앞에 딛고 벽장 윗칸에 있던 상자에서 엄마의 스웨터를 꺼냈어. 그걸 머리부터 뒤집어 썼는데도 눈물이 멎기는커녕 더 나오더라. 난 방으로 올라갔어. 우는 걸 남한테 보이는게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 왜 우는지 설명할 수 없어서 더 그랬을 거야. 수건을 얼굴에 두른 채 울고 있는데 벨라가 방문을 두드렸어. 문을 열었더니 가타부타 말도 없이 손에 뭔갈 쥐어주고 쌩하니 가버리는 거야. 펴보니까 구슬 목걸이였어. 가죽끈에 수정 원석을 꿰어서 만든 거.
멕시코로 여행 갔을 때 아빠가 벨라한테 사줬던 거였어. 어디였는진 기억 안 나. 민속시장 같은 곳이었어. 색실로 짠 장식품하고 나무 열매로 만든 인형 사이에 걸려 있었지. 바람이 부니 색색깔의 색실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빛으로 반짝였어. 홀린 것처럼 손을 뻗었는데 벨라가 나보다 먼저 손을 뻗어 잽싸게 잡아채버리는 거야. 난 내가 먼저 발견했다고 소리를 지르고 아빠를 쳐다봤어. 아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어. 싸구려 원석이라도 여덟살짜리 애한테 사주긴 좀 비싼 물건이었거든. 아빠는 그 목걸이를 벨라한테 사줬어. 나한테는 목걸이 대신 조개껍질하고 채색한 나무구슬을 엮어 만든 팔찌를 사 줬지만 난 그 목걸이가 갖고 싶었어. 벨라한테 달라고 졸랐지만 들은 척도 안 했었고, 결국 호텔에서 크게 싸웠어. 그 이후로 벨라랑 한달 넘게 말을 안했었지. 투명한 구슬하고 파란색 구슬이 번갈아가며 끼워져 있었는데… 밝은 곳에서 보면 고양이 눈동자같은 모양으로 빛이 모였어.
벨라가 제일 아끼던 거였지. 만지지도 못하게 했던 거라 한번도 자세히 본 적이 없었어. 어린애는 어린애지. 난 그 목걸이 하나에 낮에 있던 일들을 전부 잊고 한 번에 울음을 그쳤어. 나는 목걸이를 쥐고 창가로 가서 창턱에 앉았지. 가슴을 짓누르던 낮의 일들이 순식간에 씻기듯 지워졌어. 몇 시간을 질리지도 않고 해가 저물 때까지 목걸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놀았던 것 같아. 어릴 때는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어 다른 악세사리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안 하게 됐어. 지금도 방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을 거야. 벨라가 서운해할까?
클린트는 어느 때고 그녀의 말들을 잊지 못했다. 두고온 것들은 많았다. 가족, 친구, 집, 비슷한 다른 것들. 클린트는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것을 시늉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이 그녀의 가족이 되었다. 그녀가 그에게 해주었듯. 친구가 되어 줄 수도 있었다. 원래부터 그러했으니. 집을 구하고 그녀를 위해 꾸몄다. 단초부터 직접 쌓아올린 그 집을 벤자민은 좋아했다. 도통 색이 맞지 않는 화장실의 선반을 보며 웃을 때, 거실의 카펫에 손을 얹고 결을 따라 천천히 쓸어내릴 때, 클린트가 보수한 흔들의자에 앉아 거실의 테라스창 너머로 작고 좁은 그들의 정원을 응시할 때, 그리고 집안의 공기에 녹아든 듯 자연스럽게 움직일 때 클린트는 그녀가 그 집을 사랑한다는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린 목걸이는 물건이 아닌 기억이었고, 클린트가 사포질하고 페인트칠을 해 말려서 그녀에게 가져다줄 수 없는 것이었다. 클린트는 고개를 양 손에 파묻었다. 시간이 남아있었을 때 그녀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했어야만 했다. 해야 하는 이야기를 피하기 위해서 늘어놓았던 말들이 아닌, 반드시 해야만 했었던 이야기들을.
* * *
말리부에 짓던 별장의 공사가 끝났다. 토니는 말리부로 이사했다.
토니가 말리부에 지은 별장은 일반적인 주택과 달랐다. 벽체는 평범한 시공수준보다 0.5배정도 두꺼웠다. 콘크리트 벽돌과 보강재, 단열재가 들어가고 남은 공간에 일반적인 건축에 사용되지 않는 재료가 들어갔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평범하지 않은 공사였다. 토니는 업체를 신중하게 선정했다. 그는 타인이 이 건축물의 의미를 알기 원하지 않았다. 기초와 내부, 외장 공사를 각각 다른 업체에 맡겼다. 시공 각 단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그뿐이었기 때문에 토니는 직접 현장에서 공사 진행을 지켜봐야 했다. 지루하고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다만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이 주는 희열이 지루함을 잊게 했다. 토니는 회사에 거의 출근하지 않았다. 오베디아는 불평을 토해냈다. 스타크 인더스트리는 이제 막 밝은 곳으로 나온 회사였고, 오너의 역할이 중요한 때였다. 우려섞인 잔소리에 대한 토니의 대답은 CEO 전권 대행 위임장이었다. 페덱스 직원이 내민 서류를 읽은 오베디아는 고함을 지를 뻔했다. 오베디아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토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됨을 안내하는 목소리가 네 번 되풀이된 후에야 토니는 전화를 받았다.
[용건이 있으면 메시지를 보내시라고 했잖아요.] 오베디아는 토니의 말을 무시했다. “토니. 이러는 이유가 뭐냐? 하워드가 죽은 다음에야 반항기가 온 게냐?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는 네가 더 잘 알잖니.” 수화기 건너편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제가 할 일이 더 있나요?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셨던 일은 이제 끝냈잖아요.] 오베디아는 미간을 문질렀다. 이마에 깊게 주름이 패였다. “토니. 그동안 고생한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스타크 인더스트리는 이제부터야. 여태까지 해 왔던 고생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어.” [신경 안 써요. 아버지 영전에 그토록 바라셨던 합법적인 사업을 통째로 바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죠.] 전화가 끊어졌다. 오베디아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눈썹이 꿈틀거렸다. 책상에 양 손을 짚은 자세로 허공을 노려보던 오베디아는 수화기를 도로 집어들고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 명함이 필요하겠어. 새로운 명패도.” 오베디아는 비서와 통화를 마치고 나서야 전화기를 집어던졌다. 벽에 부딪힌 전화기는 박살이 났다.
오베디아의 명함은 오후가 되기 전에 새로 인쇄되었다. 기존의 소규모 업체를 연달아 인수합병하며 출현한 다국적 클린 에너지 기업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대외적 CEO는 오베디아로 알려졌다. 그의 명함에 인쇄된 문구는 공식적으로는 CEO 직무 대행이었지만 명함의 글씨가 읽기에 너무 작았으므로 그 사실에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눈 앞의 일에 무섭도록 파고드는 천재들은 신의 선물인 집중력 탓에 과정에 집중하다가 목적을 잊고 과정 그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토니 역시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다른 일을 쉽게 잊는다는 점에서는 여타의 천재들과 다르지 않았다. 토니는 세상에 없었던 것을 만들 생각이었다. 인공신경망을 벽체 안에 뉴런처럼 깔고 집의 요소요소에 드러나지 않게 인공지능의 두뇌와 눈, 입으로 동작할 하드웨어와 카메라, 스피커 시스템을 넣었다. 학습이 가능한 인공지능을 구현하려면 하드웨어의 부피는 한정없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토니는 컴퓨터를 집의 형태로 건축하는 것으로 공간과 보안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했다. 집이 완공되자 머릿속의 상상은 꼬리를 물고 차례로 현실로 펼쳐졌다. 토니는 스스로가 설계한 인공지능에 푹 빠져 애시당초 인공지능을 구축하기 시작했던 목적을 잊었다. 외부와 연결된 통로로는 텔레비전 하나만을 남겨둔 채 토니는 집의 지하실에 설치한 랩에서 두문불출했다. 아직 완전하지 않았지만 그가 설계한 인공지능은 현존하는 어떤 기술과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도 개척하지 못한 곳에 도전한다는 지적 유희는 약이나 술, 여자 같은 것들과 견줄 수 없는 자극이었다. 그 이외의 다른 것은 당장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토니는 키보드 옆에 내려두었던 머그를 들어 내용물을 한 모금 마셨다. 벽에 걸린 티비에서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새 CEO 취임 기념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토니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잠깐 멈췄다. […재 클린 에너지 사업은 1조 달러 이상의 잠재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매장석유가 거의 다 고갈되었고 비축분 역시 향후 10년 이내에 고갈될 것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죠. 저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제 절친한 친구 하워드 스타크의 아들과 함께 이 기업을 설립했습니다…. 이 기업은 하워드의 꿈이었죠. 토니는 지금 현재는 경영에 참가하고 있지 않지만…]
그는 이제 자유였다. 머리가 이상해질 정도로 오래 생각해왔던 일이었는데, 별 감흥이 없었다. 토니는 스크린에 비치는 오베디아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쳐다보다가 리모컨을 찾았다. 온 사방에 전선과 자잘한 기계부품이 널려있는 랩은 마치 정글 같았다. 리모컨이 눈에 들어오지 않자 토니는 찾는걸 포기했다. “제이J. TV 꺼." 티비가 소리없이 꺼졌다.
토니는 미소짓고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집을 나간 개는 벌써 잊었다.
* * *
병원 복도는 삭막했다. 벽을 연분홍색으로 칠해 부드러운 분위기를 내려던 의도 같았지만 천장의 조명이 너무 밝았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분홍색은 음울한 느낌이었다. 클린트는 고개를 숙여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여기요.”
눈 앞으로 뭔가가 불쑥 내밀어졌다. 캔커피였다. 클린트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 셔링 쇼트원피스에 목에 흰 실크스카프를 매고 왼쪽 어깨에 흰색 숄더백을 맨 여자가 서 있었다. 성격이 다소 세 보이기는 했지만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반쯤 넋을 놓은 상태에서도 머릿속에서 단편적인 정보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이십대 중후반. 호신 실력 상당. 의료 계열 종사자. 의사나 간호사는 아님. 백 안에는 장전된 콜트 포켓 25. 아까의 구급대원. 혼혈 혹은 외국인. 슬라브 계통. 어조나 억양에서 느껴지는 걸로 미루어 어린 시절에 이주했거나 이주 2세대 이상. 목적불명. 적의는 없어보임. 클린트는 캔커피를 받았다. “필요해 보이길래. 감사인사는 됐어요.” 여자는 클린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말을 자르고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몇 시간 째에요?” 여자가 수술중 글씨에 불이 들어온 표시등을 힐끗 보고 말했다. 클린트는 대답했다. “5시간째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자는 클린트를 쳐다보다가 조용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감싸쥐었다. 손이 따듯했다. 클린트는 고개를 숙였다. 여자가 다른 팔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을 거에요.“ 그제서야 클린트는 그가 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클린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벤자민에게 엉망인 얼굴을 보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수 좀 하고 올게요.“
걸음걸이가 영 위태로웠다. 보다못한 여자가 따라 일어섰다. 오른팔을 잡아채 끌어당기며 부축하는 서슬에 클린트는 잠자코 끌려갔다. 여자는 클린트를 남자화장실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클린트가 얼굴에 물을 끼얹는 동안 여자는 화장실 바깥 복도에 기대서서 그를 기다렸다. 클린트는 페이퍼타월로 얼굴을 대충 훔치고 나왔다. 여자가 누군가와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백에 집어넣었다.
“수술이 끝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거라네요. 신사분, 식사는 했어요?”
“아뇨. 배고프지 않습니다.”
“보아하니 잠도 안 자고 여태 식사도 안 한 모양인데 그랬다간 수술 끝나기 전에 당신도 쓰러져요. 밥 먹으러 가요. 같이 가줄게요.”
클린트는 거절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갑자기 피로해졌다. 타인의 접근을 의심하고 속내를 따져본다. 사람을 분석하고 그와 관련이 있는지 아닌지를 생각한다. 몸에 배인 습관이라 깊이 생각해본 적 없던 일들이 무거웠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린트는 그녀를 따라 병원 내 카페테리아로 갔다. 여자는 클린트를 자리에 앉히고 샌드위치를 사왔다.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 베이컨이 들어 있었다. 클린트는 감사를 표하고는 샌드위치를 한입 물었다. 입 안이 깔깔해서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할 줄 알았는데 혀 끝에 닿은 음식은 생각 외로 맛있었다. 음식의 맛을 느낀 순간 맹렬한 허기가 몰려왔다.
눈물이 떨어졌다. 벤자민이 죽을 지도 모르는데 배는 고프고 음식도 맛있다. 클린트는 샌드위치를 욱여넣으며 울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울면서 꾸역꾸역 음식을 먹는 남자와 말없이 지켜보는 여자는 이상한 조합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클린트가 샌드위치를 전부 먹을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테이블 유리 위로 식은 눈물이 고여 자국이 남았다.
식사를 마치고 클린트는 그녀와 함께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 타인 앞에서 운 건 처음이었다. 멋쩍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의 호의를 의심없이 받아들인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클린트가 그녀의 이름을 물으려던 순간 등 뒤의 문이 열렸다. 수술중 표시등에 불이 꺼졌다. 열린 문으로 초록색 수술가운의 의사가 마스크를 풀며 걸어나왔다. 클린트의 숨이 멎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며 손바닥에 축축하게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클린트는 의사에게 다가갔다. 물 속에서 걷는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클린트의 하나뿐인 취미는 독서였다. 얼마 되지 않는 여가시간을 쪼개어 클린트는 책들을 손에 잡았다. 고아원을 나온 이래로 게걸스럽게, 탐욕스럽게, 의미와 맥락에 무관하게 그저 활자 자체가 목적인 듯이 그는 책을 읽었다.
SF, 스릴러, 논문. 의학서적, 백과사전, 실용도서. 클린트는 책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중 클린트의 마음을 가장 잡아끈 건 소설이었다. 그저 어떤 삶의 단면을 그려낸 이야기들.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일상의 이야기들은 클린트에게 그가 해보지 못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클린트는 언어가 그려내는 세계들을 읽으며 동경과 질투를 느꼈다. 직장을 다니고, 월급 때문에 이직을 고민하고, 직장 동료와 연애를 하거나 상사의 험담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 평범한 삶의 장면들.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화면에 클린트는 자신을 넣어보곤 했다. 여자친구를 위해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는 클린트, 숙취로 일을 농땡이피우는 프란시스, 가족의 병을 눈치채고 손을 잡아주는 바튼.
상상은 늘 상상이다. 클린트는 소설 속에 종종 등장하던 상투적인 장면을 각기 다른 작가의 다른 버전으로 수십 번은 읽었다. 의사가 주인공에게 다가온다. 서두는 거의 동일하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주인공은 차마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소리친다. [거짓말, 거짓말이죠? 선생님, 거짓말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의사는 침통한 목소리로 고개를 젓는다. [유감입니다.] 주인공은 무너진다.
주인공에게 이입하며 소설을 읽을 때 클린트는 그가 느끼는 슬픔을 자신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클린트는 그동안 자신이 책을 읽으며 느끼던 감정들이 실제의 날것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의사에게서 벤자민의 사망을 전해들었을 때 클린트는 비로소 어떠한 완벽한 문장도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그려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의사는 사무적인 어투로 그녀가 장결핵을 앓고 있었다는 것과 폐결핵이 아니라 바깥으로 드러나는 징후가 많지 않았다는 점, 병으로 인해 떨어진 체력이 출산과 출혈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설명했다. 첫 문장은 역시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이었다. 아이에 대해 의사가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클린트는 의사를 두고 몸을 돌렸다. 걸음을 내딛다가 무릎이 풀려 주저앉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여자가 뛰어와 클린트를 부축했다. 클린트는 그녀에게 괜찮으니 놓아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 말을 무시했다. “팔 내 어깨에 둘러요. 다리에 힘 주고. 설 수 있겠어요?” 대답할 단어들이 말로 구성되지 않았다. 클린트는 그녀의 어깨에 매달렸다.
* * *
집이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클린트는 주방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불이 꺼진 집안은 어둑어둑했다. 부엌 뒷문에서 스며드는 감지등의 희미한 빛만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오른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다. 키홀더였다. 클린트는 키홀더를 식탁에 내려놓고 무심코 자켓의 주머니에 왼손을 넣었다. 캔커피가 손에 잡혔다. 클린트는 캔커피를 키홀더 옆에 내려놓았다. 자켓을 벗어 식탁 의자의 등받이에 걸고 의자를 빼 앉았다.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손에 닿는 피부가 버석버석했다. 깊게 심호흡을 한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클린트는 심호흡을 두어번 더 반복하고 얼굴을 들었다. 물에 잠긴듯한 먹먹함이 오감을 덮었다. 부엌 뒷문의 등이 꺼지자 집안은 완전히 어둠에 묻혔다. 클린트는 어둠을 응시했다. 집 안 어디에선가 벤자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착각이 들었다.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그 연약한 소리가 흩어질 것 같았다.
부엌 뒷문이 열리고 다시 감지등이 켜졌다. 주황색 불빛이 목 뒤로 쏟아졌다. “괜찮아요? 좀 들어갈게요.”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클린트는 소스라쳐 일어섰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를 냈다. 반쯤 열린 문 바깥에 늘씬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머리 위로 주황색의 불빛이 금실처럼 흘러내렸다.
나타샤는 초조하게 차를 주차시켰다. 내버려둘 수 없어서 주소를 물어 집까지 데려다 주었지만 그냥 가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Shit. 나타샤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뭔가를 주우면 그것에 얽힌 사연까지 함께 주워야 한다는걸 그녀는 경험으로 잘 알았다. 그래서 되도록 남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순간들은 늘 생겨난다. 예기치 않게, 불가항력적으로. 구급차 안에서 채 눈물에 젖지조차 못하는 눈과 마주쳤을 때처럼. 나타샤는 기어를 중립으로 돌리고 엔진의 시동을 껐다. 부서져라 문을 닫고 잠근 후 나타샤는 남자가 들어간 집으로 뛰어들었다. “괜찮아요? 좀 들어갈게요.” 문을 밀면서 나타샤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열린 문 틈으로 흐린 주황색 불빛에 떠오른 실루엣과 눈이 마주쳤다.
구급대원은 직업의 특성상 온갖 종류의 사람과 맞닥뜨린다. 직업과 재산,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그녀는 수백명의 사람들에게서 같은 눈을 보아왔다. 문득 모래가 버석거리는 환청이 들렸다. 외롭고 메마른 눈이었다. 조도가 형편없는 희미한 조명에서도 그 눈동자는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집 안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팔을 뻗어 머리를 감싸안는다. 남자는 순순히 끌려왔다. 나타샤는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게 했다. 남자는 여전히 울지 않았다. 감지등이 꺼지고 집 안에 다시 어둠이 내렸다. 클린트는 끝까지 울지 못했다.
* * *
사랑받는 아내이자 친구였던 벤자민 애쉬튼. 향년 27세
함께 했던 사랑스러운 추억을 담아
클린트는 비석의 문구를 한번 더 훑어보고 일어섰다. 마른 풀이 손 끝에 묻었다가 떨어졌다. 클린트는 시선을 돌렸다. 멀리 어두운 색의 옷을 입은 조문객들이 몇몇 보였다. 절기상 초겨울이었지만 마이애미의 기후는 따듯했다. 클린트는 비석 주위를 덮은 녹색의 잔디와 조경수로 심어진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아버님과 벨라 곁에 묻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한참만에 나온 목소리는 속삭이듯 작았다. 클린트는 손을 뻗어 비석의 모서리를 만졌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모서리는 부드럽고 차가웠다. 벤자민은 추운 것을 싫어했다. 그녀가 느끼던 추위는 현실과 무관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따듯한 곳이라 다행이었다.
“아이 이름은 노아야. 내가 마음대로 지어서 미안. 네가 지어놓은 이름은 전부 여자애 이름이라.”
죽어서 묻힌 게 그녀가 아니라 클린트였다면 벤자민은 비석의 이름으로 적당할 가명을 고르느라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네 네이밍 센스는 최악이니까. 날 유진이라던가 다니엘 같은 이름으로 매장했으면 난 분명 죽었다가도 벌떡 일어났을 거야. 클린트는 속으로 실없는 농담을 중얼거렸다. 멀찌감찌 서있던 나타샤가 다가오는게 보였다. 클린트는 나타샤를 향해 걸었다.
정문으로 통하는 넓은 길로 접어들자 검은 원피스를 입은 나타샤가 옆으로 다가섰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클린트가 입을 열었다.
“경황이 없어서 미처 말 못했었는데… 고맙습니다. 여러 가지로요.”
“별 말씀을.” 나타샤가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연고 하나 없는 이곳에서 이렇게 매끄럽게 장례식을 치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클린트는 다시 한번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나타샤는 대답 대신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정오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어깨로 떨어지는 햇볕이 따듯했다. 클린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이 부셨다. 걸음을 멈추자 나타샤가 몇발짝 앞에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붉은 머리카락 위로 떨어지는 햇볕이 금관같이 반짝였다. 클린트는 기시감을 느꼈다. 처음 만난 날 밤에 느꼈던 것과 같았다. 금색의 관을 쓴 그녀는 천칭을 든 여신이나 천사처럼 보였다. 죄를 고백한다면 정확히 그만큼 그를 단죄해줄 것 같았다.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여태껏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들. 클린트는 지금이 아니라면 다신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걸 알았다.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그녀를 죽인 겁니다.”
나타샤가 눈썹을 조금 들었다. 그러나 곧 아무 말 없이 클린트에게 완전히 몸을 돌렸다. 들어줄 테니 이야기해보라는 태도였다. 클린트는 잠시 입을 닫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말을 가다듬어보려고 입을 다물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다. 클린트는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벤자민은 고민했어요. 노아를 낳을지 말지. 그녀가 노아를 지우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는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부탁했어요. 아무런 걱정도 없이 살게 해 주겠다고. 그의 눈에서 벗어나서, 아이를 키우면서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내 인생을 바쳐서 지켜줄 테니 부디 그 아이를 낳아달라고. 가족이 되자고. 벤자민은 가족을 전부 잃은지 얼마 지나지 않았었어요. 내가 그녀의 약점을 이용했습니다. 내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살아있었겠죠.”
나타샤는 클린트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지금 그에게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공동묘지에서 마주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는 남녀는 어색한 풍경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지나갔다.
“그런데, 정말 괴로운 건,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별로 죄책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벤자민은 분명히 내 친구였고, 그녀를 사랑했는데. 내가 벤자민에게 함께 떠나자고 제안했을 때, 나는 그게 우리 셋을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벤자민을 위해서도 가장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가 정말 그녀를 위해 그런 제안을 했던 건지, 나 자신만을 위한 거였는지, 혹은…그를 위한 거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녀가 떠나간게 실감나지 않아요. 내가 정말 그녀를 위했다면, 난 왜 지금 슬프지 않은 겁니까?”
나타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녀는 오늘이 클린트를 만나는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했다. 주운 것에 대한 책임은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난 심리 전문가도 카운슬러도 아니지만 주제넘게 한마디 해보자면, 사람들은 그래요. 너무 큰 사건이나 충격이 닥치면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현실과 자신을 일단 격리하죠. 남의 일처럼 느끼도록. 큰 일이 갑자기 다가와 마음을 부수어놓지 않도록. 당신은 슬프지 않은 게 아닐 거에요. 다만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이죠.”
나타샤는 그녀의 손으로 클린트의 손등을 덮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이에요.” 아무래도 그 시간이 짧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은 삼켰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을 지켜봐야 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린트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타샤는 클린트의 옆으로 가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가요.”
클린트는 침대 끝에 앉아 있다. 손 끝에 닿는 시트의 감촉과 공기에 섞인 향수는 익숙한 것이다. 클린트는 이 장소를 알고 있다. 벽 한쪽을 따라 나있는 프랑스식 창문을 통해 빛이 바닥의 카펫에 닿는다.
사위가 고요했다. 공기가 정체된듯한 정적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다. 침대에 누군가 잠들어 있다. 깊이 잠들었지만 잘생긴 미간에 금이 가 있었다. 클린트는 그것을 펴주고 싶다고, 혹은 얼굴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는지 알았다. 사람들의 세상에서 이것과 유사한 감정을 그들은 친애라고 불렀다. 친밀히 사랑함. 혹은 그 사랑. 무언가로 고통받고 있을 때 곁에 있어 주고 싶어지는 마음. 하지만 그것은 클린트가 배우도록 허가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손을 내밀지도, 미간의 주름을 문질러 펴려 하지도 않는다.
주인이 잠든 방에서 홀로 깨어있는 것은 낯선 장소에 버려진 아이의 기분과도 같았다. 클린트는 곧 고립된 기분을 느낀다. 허락 없이 방을 떠날 수는 없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불편하다. 그는 눈으로 벽지의 무늬를 하릴없이 헤아린다. 몇천까지 입 안으로 세고 나서는 무료해져 그만두었다. 클린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한쪽 면을 채운 서가로 다가갔다.
책장은 빽빽하게 책으로 들어차 있었다. 책의 제목은 그가 모르는 글자로 씌여 있어 읽을 수 없었다. 클린트는 서가의 끝에서 끝까지 눈으로 책등을 훑으며 걸었다. 맨 마지막 칸에서 낯익은 제목의 책이 보였다. 클린트는 책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제목이었다. [노아의 방주]. 오래 전 이 저택의 소각로에서 불탔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클린트는 책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책을 빼지는 않는다. 방 안의 물건은 허락 없이 만질 수 없다. 그는 책을 꺼내어 펴보지 않아도 87페이지 어름과 143페이지에 접힌 자국이 있고 25페이지에는 마른 코피자국이 남아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클린트는 일어서서 침대 곁으로 되돌아갔다.
의자를 하나 끌어와 침대 옆에 앉는다. 정적 속에서 햇빛이 가라앉았다. 클린트는 오래도록 잠든 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었다. 혹은 알게 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 용기를 내기로 한다.
손끝이 부유하는 먼지 사이를 가로질렀다. 방 안은 조용했다. 그의 검지손가락 끝이 잠든 사람의 미간을 짚는다. 잠들어있던 눈꺼풀이 조금 움직였다. 속눈썹의 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클린트는 숨을 죽인다. 매미의 허물벗기를 지켜보는 소년처럼.
“대디. 그만 일어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닿았다. 품에 따듯한 것이 감겼다. 아이를 끌어안으며 클린트는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클린트 바튼은 서른 넷이다. 생년월일이 불확실했기에 어쩌면 서른 다섯, 혹은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정확한 나이는 몰랐다. 머리카락은 잿빛 금발, 눈동자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녹색이었다. 빛이나 주변 색에 따라 갈색이나 파란 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키는 178cm, 몸무게는 65에서 68키로 사이를 오갔다. 단단해보이는 체격 덕에 실제보다 더 나가 보였지만 어린 시절 제대로 먹질 못해서인지 몸이 자라고 나이를 먹은 후에도 체중이 잘 늘지 않았다. 체중을 물은 사람들은 대개 같은 말을 했다. “생각보다 적게 나가네.” 클린트는 웃으며 “몸매관리에 신경쓰다 보니.” 라고 대답했다.
일요일이면 꼬박꼬박 꼬마 노아의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갔고 미사나 예배에 성실히 참석했다. 십일조 역시 거르지 않았으나 신실하거나 추상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따지자면 실용주의자나 현실주의자에 가까웠다. 월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리스트에 적은 것들만 칼같이 쇼핑하고 나오지만 집 안의 세간을 고치거나 만드는 차고의 공구함과 지하실의 식료품 창고는 가득 채워두는 타입이었다. 필요 이외엔 말을 아꼈고 행동 역시 그랬다. 쓸데없는 감상에 젖는 것을 달기지 않는 성격이었다. 단지 가끔 누군가 불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어딘가에 골몰하곤 했다.
“아빠?”
클린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릎에 얹어둔 오른손이 미끄러져 의자를 짚었다. 노아가 무릎에 반쯤 기어올라와 있었다. 클린트는 아이를 안아올렸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이는 곧잘 뛰었고 발음도 제법 또렷했다. 크레용과 스케치북을 잡고 있는걸 보고 나왔는데 벌써 질린 모양이었다. 양 손이 무지개색으로 얼룩덜룩했다. 클린트는 아이를 안아올리며 카우치에서 일어섰다. “벽이나 바닥에 낙서한 건 아니지, 노아?” 노아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도리질쳤다. 웃음이 말갰다. 클린트는 아이를 안은 채 정원을 향해 섰다. 햇살이 따듯했다. 눈 닿는 곳의 정원이 꽤 무성해 있었다. 주말에는 정원을 손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클린트는 집으로 들어갔다. 팔에 걸리는 체중이 제법 묵직해졌다.
아이는 그의 목을 껴안고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클린트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화장실에 아이를 내려놓고 세면대에 물을 채우자 노아가 아이용 발받침을 세면대 아래로 가지고 왔다.
노아는 발받침 위로 올라가 세면대에 손을 씻었다. 물을 이리저리 찰박거리면서 아이가 다시 한번 채근했다. “아빠, 아까 이상한 표정이었어. 무슨 생각 하고 있었던 거야?” 대답이 곤궁했다. 클린트는 수건을 아이의 머리 위로 떨어트렸다. 아이가 수건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클린트는 노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세듯 쓰다듬었다. 노아가 더 질문하기 전에 클린트는 아이를 안아들었다. “옷 입어야지. 이제 슬슬 나가야겠다. 냇이 기다릴거야.” 나타샤의 이름을 꺼내자 아이는 클린트가 더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먼저 화장실을 뛰어나갔다. 제법 묵직해진 발소리가 마룻바닥을 구르며 멀어졌다. 클린트는 시선을 화장실 안으로 돌렸다. 파란색 유리타일과 체리목 수납장은 여전히 색이 맞지 않았다.
3년 전 탐사보도 전문기자 피아나 로트슈먼은 전세계 유력 유전 대부분이 이미 고갈되었음을 정부가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다는 내용의 폭로기사를 보도했다. 국채와 증시는 바닥에 떨어졌고 정부의 예산안도 긴급 긴축모드로 재편되었다. 에너지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2차, 3차 산업은 사회적 냉대를 면치 못했다. 복지예산은 연말마다 삭감되었고 도시에서는 오일이슈와 에너지 이슈가 연일 매스컴을 탔다. 각종 산업이 에너지 이슈로 타격을 입을 때 에너지산업만 호황을 누렸다. 클린트는 뉴스 화면에 떠 있는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새로운 CEO] 라는 문구와 사진을 보았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보다 더 자신감 넘치고 세련되어진 얼굴이었다. 6년의 세월을 지울 수는 없어 이제 20대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에서 느껴지는 세월은 노화라기보다 숙련미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전에는 없던 수염을 기른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다. 잘 어울리네. 머릿속으로 감흥 없이 중얼거리고 클린트는 식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아의 접시 구석에 완두콩이 모여 작은 산이 되어있었다. “노아. 완두콩도 다 먹어야지.” 노아가 볼을 부풀리며 포크의 뒷부분을 식탁에 두드렸다. “맛 없어요. 햄버거 더 먹으면 안돼요?” 클린트는 노란색의 병아리 모양을 한 유아용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아침 메뉴는 완두콩, 당근, 감자와 토마토를 넣어 만든 오므라이스와 치즈를 얹은 햄버거였다. 노아는 치즈 햄버거는 남기지 않고 전부 먹었고 감자와 토마토도 그럭저럭 먹었지만 당근은 반 정도, 완두콩은 거의 다 골라내놓았다. 클린트는 먹을 것을 거의 가리지 않았지만 그에게도 식재료의 선호도는 있었다. 노아의 입맛은 채소와 과일류를 고기보다 선호하는 클린트와 달랐다. 유전자란 시간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친아버지를 한번도 본 적 없는 아이는 무섭도록 그와 입맛이 비슷했다. 클린트는 새삼스레 노아의 얼굴을 뜯어본다. 성별이 분화되지 않은 나이의 아이들은 대체로 비슷했다. 조금 더 자라서 뼈가 굳고 윤곽이 또렷해지기 전까지는 대체로 동그랗고 포동포동하다는 말로 설명이 가능하다. 노아 역시 아직은 인상이랄게 없는 얼굴이었다. 그저 아이의 동그랗고 총명해보이는 큰 눈동자가 시선을 끌었다. 눈을 깜빡일때마다 긴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유달리 길고 진한 속눈썹은 아이의 얼굴에 화려한 느낌을 덧씌웠다. 다만 그뿐이었다. 아이의 얼굴에서 눈 이외에 그를 연상시키는 곳은 없었다. 클린트는 내심 안도했다. 이대로 자라면 아이가 나이를 먹은 후에도 그와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벤자민을 많이 닮았다. 클린트는 의자를 빼 노아의 옆에 앉았다. 식탁에 팔을 괴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다. “노아. 완두콩이 왜 싫으니?” 노아는 동그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연한 금갈색의 고수머리가 정수리에서 살랑거렸다. “딱딱하고, 아무 맛도 안 나요.” 클린트는 미소지었다.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그가 웃자 그저 따라 웃는다. 아이의 웃음이 부드럽게 속살거렸다. 행복했다.
“아빠가 내일부터는 완두콩을 부드럽고 맛있게 요리해 줄게. 대신 노아도 완두콩 골라내지 않고 먹는거야. 어때?” 클린트가 손을 내밀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끼손가락을 엮었다. “맛 없으면 대디도 먹으라고 안 하기.” “좋아.” 클린트는 고개를 숙여 노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아이에게서 보들보들한 우유냄새가 났다. “그럼 이제 옷 갈아입자. 곧 케일리 아줌마가 올거야.” 클린트는 아이의 엉덩이를 두드려 방으로 보내고 식탁 위의 차키를 집어들었다.
클린트는 단조로운 일상을 살았다. 오전 9시에 베이비시터가 집으로 오면 집 열쇠와 아이를 부탁하고는 집을 나섰다. 클린트가 3년째 근무하는 곳은 지역 내 물류를 취급하는 작은 택배회사의 창고였다.
클린트의 수입은 일정치 않았지만 그의 소유로 되어있는 집이 있는 탓에 더이상 보육교사의 방문을 받을 수 없었다. 12시간 이상 아이를 돌봐줄 베이비시터는 많지 않았다. 아이가 두 살이 되던 해에 클린트는 나타샤에게 새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3주 정도 후에 그녀가 내민 서류는 택배회사의 물류창고 한 구역을 관리하는 일자리의 고용계약서였다. 새로운 일은 에어컨 정비일보다 편하고 급료도 높았다. 클린트는 9시 반부터 저녁 7시 반까지 일했다. 주황색 유니폼을 입고 화물들을 나르고 적재하고 내역서를 작성하다보면 하루가 금세 흘러갔다. 저녁 8시쯤 집에 돌아와 꼬마 노아와 함께 베이비시터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돌아오면 9시였다. 노아의 잠자리를 봐주고 잠들때까지 옆에 앉아있다가 아이가 잠들면 홀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나타샤는 종종 불쑥 나타나 클린트의 저녁식사에 동참했다. 그녀의 방문은 불규칙적이었고 그녀가 내킬 때 나타났기에 클린트는 그녀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타샤가 그것에 대해 서운해하는 일도 없었다. 클린트가 어두운 주방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으면 그녀는 소리도 없이 나타나 식탁에 자신이 먹을 식사거리를 내려놓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했다. 이따금 몇 마디 말이 낮은 목소리로 오갔다. 나타샤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클린트의 오른쪽 자리는 벤자민이 앉던 자리였다. 클린트는 그 자리를 비워두었다. 나타샤에게 그 자리에는 앉지 말아달라고 말한 적도, 그곳이 그녀의 자리였다고 말한 적도 없건만 그녀는 한 번도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그의 삶에 뛰어든 것처럼 그녀는 항상 불쑥 나타났고 클린트가 정해놓은 선 이상을 넘지 않았다. 클린트는 가끔 그녀에게 고마워해야할지 서운해해야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혼란스러움은 달갑지 않은 소식처럼 살그머니 나타나 우체통이나 휴지통같은 일상 안에 숨어있곤 했다.
세상사람들은 그와 그녀가 연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남자와 애인 없는 여자. 둘은 일주일에 3일정도는 함께 저녁을 먹고 주말이나 휴가를 함께 보낸다. 나타샤는 인형처럼 예쁜 얼굴과 달리 야구 광이었고 야구장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노아가 네 살이 넘자 그녀는 노아에게 보스턴 레드삭스의 유아용 야구점퍼와 야구모자를 입혀 야구장에 데리고 갔다. 메이저리거의 개막날이었다. 몰려든 인파 속에서 노아와 똑같은 점퍼와 모자를 걸친 그녀는 아이와 한가족으로 보였다. 클린트는 나타샤가 노아를 무등태우고 야구의 규칙을 알려주며 그라운드를 가리키는 동안 한발 물러서 있었다. 노아는 나타샤의 머리칼을 쥐고 소리내 웃었다. 야구장을 손가락질하며 목을 감싸안고 뭔가를 속삭이자 나타샤는 아이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노아가 본 것을 보고 따라 웃었다. 소설 속의 일상이 거기 있었다.
클린트는 의기소침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날은 그녀가 예약한 숙소에서 묵고 다음날 경기까지 볼 예정이었지만 클린트는 고집을 부려 노아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나타샤는 일년에 한번뿐인 메이저리거 개막 관람을 망친 클린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티켓값을 톡톡히 치르게 했을 뿐이다.
가끔 퇴근이 이른 날에는 노아를 데리고 나타샤와 시내에서 저녁을 먹었다. 겉보기에 그들은 평온하고 평범한 가족처럼 보였다. 클린트와 나타샤 사이에 섹스가 없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나타샤는 그가 허용한 만큼만 다가왔다. 그녀의 태도는 현명했다. 허용한 이상으로 다가왔다면 클린트는 나타샤를 신뢰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 말을 편하게 섞는 사이가 되기까지는 함께 했던 많은 시간과 많은 사건이 필요했다.
클린트는 그들의 관계가 비일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정해놓은 선 이상으로는 다가오지 않으려 드는 그녀를 느낄 때마다 서운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번갈아 치밀었다. 이따금 조급한 마음이 솟았다. 고개를 저어 해묵은 감정들 밑에 가라앉히곤 했다. 그는 아직도 원하는 것이 안정인지 그녀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번 여름 휴가엔 맨하탄에 가있을 거야.“
나타샤가 말했다. 클린트는 감자샐러드를 접시에 옮겨담던 손을 멈췄다. 볼에 급히 찔러넣은 주걱에서 샐러드가 튀어 앞치마를 더럽혔다. 클린트는 혀를 차고 앞치마를 풀었다. 어제 세탁했는데.
앞치마를 세탁실의 바구니에 넣고 돌아오자 나타샤는 먼저 식사중이었다. 샐러드를 입으로 가져가는 모양이 며칠 굶은 사람같았다. 저 식사량에 저 몸매는 순 사기다. 클린트는 맞은편의 의자를 빼 앉았다.
"사람들이 너 그렇게 먹는 거 알아?“ 혀 차는 소리에 나타샤가 눈썹을 들었다.
“사람들 누구?”
“그냥 사람들. 너 아는 사람들.”
나타샤는 흐응, 하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소리를 냈다. 클린트는 대화를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 났다. 나타샤가 먼저 식사를 마치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같이 맨하탄에 갈 거야?” 나타샤가 식기세척기에 식기를 밀어넣고 맞은편에 도로 앉았다. 클린트는 속으로 두 번째로 혀를 찼다. “맨하탄에 가면.” “가면?” “가면 뭐 하냐고. 지낼 곳도 없어.” “왜 없어. 호텔 있잖아.” “돈 없어.” 그의 살림살이를 자기 것보다 더 잘 아는 그녀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이다. 클린트는 다시 속으로 혀를 찼다.
“노아 엄마네로 가면 되겠네.” 클린트는 고개를 들었다. 나타샤의 표정은 담담했다. 클린트가 말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언급한 건 처음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신이 난 노아가 숨막히는 웃음소리를 냈다. 빨간 색의 지붕들이 등 뒤로 내달렸다. 미지근한 바람이 눈을 때린다. 나타샤가 고개를 뒤로 돌려 얼굴을 반쯤 가리는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고는 웃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노아가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최고에요!” 나타샤가 웃으며 엑셀을 더 밟았다. 엔진소리가 높아지며 몸이 홱 뒤로 젖혀졌다.
“냇!” 바람 때문에 클린트는 고함을 질러야 했다. 나타샤가 못 들은척 라디오를 켰다. 요란한 비트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뉴욕에 진입하자 나타샤는 차의 속도를 줄였다. 마냥 신나있던 노아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클린트는 겉옷을 벗어 노아에게 덮었다.
“그냥 뉴욕 쪽의 공항으로 들어오면 좋았잖아. 몇 시간이나 이게 뭐야.”
“노아가 신나했다는 거 잊지 말아 주겠어?”
숙소는 나타샤가 예약했다. 그녀는 유명 지역 가이드지에 나오는 호텔 대신 좁은 골목길로 차를 몰았다. 길 찾는 모양이 마치 이곳에 사는 사람인 양 능숙했다. 그녀가 차를 세운 곳은 가정집처럼 보이는 2층짜리 건물이었다. 주차장으로 통하는 진입로 옆에 세워져있는 어른 키높이의 입간판이 아니었다면 가정집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 10층 이상은 되보이는 빌딩들 사이에 거짓말처럼 끼어있는 2층 목조건물은 동화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흰색으로 칠해진 건물은 세월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공들여 손본 듯 단정해보였고 객실의 테라스는 마음껏 자란 제라늄과 넝쿨장미로 장식되어 있었다.
“맨하탄에 와본 적 있어?”
나타샤는 대답 대신 키를 돌려 엔진을 껐다. 요란한 엔진음이 건물 안에도 들린 모양이었다. 현관문이 열리며 사자 갈기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체격 좋은 남자가 나왔다. 그는 차에서 막 내리는 나타샤를 보고 반색하며 양 팔을 벌렸다.
“나타샤!! 블랙 위도우Black widow!”
나타샤는 남자의 품 안으로 한달음에 뛰어들어 안겼다. “울버린Wolverine!! 오랜만이야.” 클린트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을 느끼며 노아를 안아들었다. 한손에 짐가방을 들고 내리자 한참이나 인사를 주고받던 남녀가 그제서야 클린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활달하게 외쳤다. “이런, 실례했소. 냇을 보는게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그만. 자자, 들어가시죠. 손님을 오래 세워두면 안 되지. 냇의 친구는 내 친구요. 내 집에 온걸 환영하오.”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은 보기 드물게도 목조였다. 계단을 밟을때 희미하게 나뭇결이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발 밑에서 휘어지는 느낌이 났다. 집 안은 조용했고 그늘진 곳 특유의 서늘한 냄새가 났다. 안정감을 느낄만한 분위기였는데도 계단을 밟아 올라갈때마다 나는 삐그덕소리가 이상스럽게 불안감을 부추겼다.
방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도심 한복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클린트는 캐리어를 열어 몇 벌의 옷을 옷장에 걸었다. 나타샤는 집을 구경시켜준다며 노아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클린트는 혼자 남았다.
얼마 되지 않던 짐을 정리하자 할 일이 없었다. 클린트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천장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엷은 하늘색의 꽃무늬가 작게 인쇄되어 있었다. 마름모꼴로 등간격을 이루며 인쇄된 꽃무늬를 눈으로 헤아리다 클린트는 몸을 웅크리며 돌아누웠다.
멀지 않은 곳에 그가 있었다. 클린트는 왜소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몸을 옹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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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이제 다섯살이고, 앞으로 점점 더 엄마에 대해 궁금해하게 될 거야.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을 작정이야? 현재가 어떻든 과거의 정리는 필요해. 내가 주제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말해. 하지만 여름엔 맨하탄에 함께 가줘야겠어."
어떻게 설명했어야 옳을까? 차가운 석벽 안에서 보냈던 16년을 전부 설명했어야 할까? 사람 손 닿지 않은채로 자라나 얽힌 나무뿌리처럼 제멋대로 비틀리고 괴상하게 얽힌 그 관계들을 전부 이야기하고 이해를 구했어야 맞는걸까? 나타샤의 말은 정론이었고 클린트는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6년만에 이곳에 돌아와 앉아있는 것이다. 클린트는 아까부터 만지작거리던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구깃구깃해진 쪽지에는 굳이 보지 않아도 이미 외워버린 주소가 적혀있었다. 클린트는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았던 자켓을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쪽지 아래쪽에 적혀있는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네번정도 반복된 후 우아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필즈 변호사 사무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까부터 만지작거린 쪽지는 그저 구겨지기만 했을 뿐 젖거나 너덜너덜하진 않았다. 바싹 말라있던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클린트는 휴대폰을 쥐고있던 손을 바꿔쥐고 오른손을 청바지에 닦은 후 입을 열었다.
"애쉬튼씨의 일로 상담을 원합니다."
상냥하지만 기계적인 목소리가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라는 멘트를 남기고 끊어졌다. 클린트는 대답을 기다리며 휴대폰에 귀를 기울였다. 도심답지 않은 고요함이 고립감을 불러왔다. 방의 가운데에서, 건물의 한 구석에서, 지역구의 한 지점에서, 도시 안에서. 수화기 반대편의 반응을 기다리면서 클린트는 섬이 된 기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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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자네 화가 많이 났구만. 일단 진정해보게. 토니가 괴팍한 거야 하루이틀 일도 아니지 않나… 아니, 내 말 뜻은. 이것 참, 서로 다 아는 처지에 왜 이래."
오베디아는 수화기를 쥔 손을 고쳐 잡았다.
"그녀석이 좀 별난데가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천재잖나. 천재들은 원래 그렇게 묘한 구석이 있어. 그 천재성 덕분에 회사가 이만큼 큰 것도 사실이고. 토니가 가끔 사람을 참지 못하게 한다는건 나도 물론 잘 알지… 하지만 적당히 비위를… 이런. 그렇게 흥분하지 말게. 하워드를 생각해 봐.
뭐? 내가? 하하. 농담하는 거겠지? 아무리 토니가 회사에 거의 나와보지 않는다고 해도 난 어디까지나 하워드의 유지를 받아 토니를 돕는 입장에 불과해. 내가 최고경영자가 된다면 세상 사람들이 날더러 뭐라고 하겠나. 대자의 자리를 뺏은 파렴치한 취급을 받을 텐데. 허먼, 자네 날 곤란하게 만드는구만. …물론 잘 알고 있지. 스타크 인더스트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는지는 토니보다 내가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토니가 회사에 손해를 입히고 있다는 것도 물론 잘 알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허먼, 이러지 말게. 난 그 애의 대부야. 최고경영자 해임안이라니, 다들 농담이 과하군그래. 그 애가 아무리 개판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그건 안 되는 일이야. 허먼, 받아야 하는 전화가 걸려오고 있군. 미안하지만 다음에 마저 얘기하세. 내 또 연락하지. 좀 참고 기다려주게. 어떻게 손을 써 볼 테니."
오베디아는 반대편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만족감 어린 미소가 희미하게 얼굴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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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 아침에, 혹은 점심에. 모든 저녁과 잠들기 직전에 클린트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안다는 것과 감정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같은 성별의 형제이자 친구인 사람에게 느껴지는 감정이 과연 실재하는지, 혹은 알고 있었던 추상적인 개념을 스스로가 느끼고 있다고 믿는 것인지.
자신감이 지나쳐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그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의 지성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고 논파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으니. 클린트는 무언가를 배우고 몰입하는것을 좋아했지만 그가 보는 것과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볼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토니가 보는 것이 보이지 않았고, 토니가 이해하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집착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생각하고 고민하면 언젠가는 답을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지나쳤던 집착이 관계를 어그러지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는 그 집착이 사람에 대한 것이었는지 감정에 대한 것이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이었는지조차도.
"프란시스 씨. 들어오세요." 건조한 목소리가 클린트를 현실로 호출했다. 클린트는 앉아있던 낡은 쇼파에서 일어섰다. 군데군데 얼룩이 생겨 흉하게 변한 인디언핑크 색의 문으로 들어서자 책상 뒤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클린트는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을 내밀어 맞잡으며 순간적으로 방 안과 남자를 훑었다. 환경에 대한 파악은 거의 본능이 될 만큼 받았던 교육이었다. 습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클린트는 웃는 얼굴로 남자에게 인사를 건네며 머리 한 구석으로는 순간적으로 입력한 정보를 분석한다:남자, 추정 55세. 180cm, 92kg. 바다낚시 취미 있음.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동호회에 가입되어 있음.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이 그다지 순조롭지는 못한 상태. 이혼 혹은 별거. 이혼쪽에 조금 더 높은 가능성: 경제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음. 수입이 적은 탓이라기보다는 엉뚱한 곳에 돈을 쓰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음. 가정불화는 돈이 많이 드는 여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
변호사는 책상 앞 쇼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클린트는 문에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필즈는 클린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애쉬튼씨의 일로 전화 주셨던 분이십니까?" 클린트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클린트는 방 안의 물건들로 파악했던 필즈가 아닌 인간 필즈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웃을때 눈꼬리가 조금 접히는 선량한 인상. 우유부단해보이는 처진 입매와 벨트 위로 늘어진 배, 두툼하고 큰 편이라 젊었을 때는 운동을 했을 것 같은 손이지만 지금은 굳은 마디 하나 없이 혈색 좋은 분홍빛 손과 손톱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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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시절 클린트는 수업에 꼬박꼬박 나오는 일이 드문 학생이었다. 일주일 중 이틀은 결석이었고 출석을 해도 엎드려 자다가 교수에게 지적받는 일이 잦았다. 질문을 받으면 자다 깨 부스스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는데 거의 늘 정답이었다.
가끔 대답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인상을 찌푸린 채 허리를 깊이 숙여 교수에게 사과를 했다. 표정은 험상궂었지만 사과하는 자세는 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교수들은 대개 사과를 받고 마음을 풀었다.
클린트는 학부의 명물 중 하나였다. 강의는 듣지 않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은 거의 없고, 고된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양 늘 피로해 보였지만 옷이나 소지품은 눈썰미 없는 사람도 쉽게 알아볼만한 고급들 뿐이었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떠들어댈 조건으로 충분했다. 여학생들은 호기심을 담아 재잘거렸고 남학생들은 미심쩍은 혹은 조롱하는 시선으로 수근거렸다. 간혹 재미 혹은 흥미로 클린트에게 접근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클린트의 무반응에 얼마 견디지 못하고 제풀에 떨어져나갔다.
대학생들이 머저리같은 짓에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건 넉넉히 잡아도 3학년 2학기까지다. 그 이후부터는 치열한 취업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인턴쉽과 취업 스터디가 활발해지면서 학생들은 바빠졌다. 4학년의 첫 학기가 시작할 때 쯤에는 아무도 클린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선배들에게서 몇 마디 주워들은 신입생들이 이따금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곤 했지만 예전같은 접근은 없었다. 클린트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로 학교에 나왔다.
벤자민이 클린트에게 말을 건건 학기가 시작하고 3주 남짓 지난 화요일의 점심시간이었다. 미술사와 서양화 실기 사이에 2시간정도 시간이 비었다. 멜리사는 오전에 전화로 대출을 부탁했다. 케이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날 클럽에서 진탕 퍼마시고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미술사 시간은 조용했다. 출석한 학생 역시 몇 없었다. 보통 1학년 혹은 2학년이 교양과목의 학점을 채우기 위해 듣는 시간이라 출석률은 형편없었다. 벤자민은 턱을 괴고 강의를 들었다. 나이 지긋한 교수는 단조로운 톤으로 말했다. 강의가 끝났을 때 살아있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벤자민은 파일을 정리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점심을 먹던 둘이 없으니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다.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학생식당까지 갔지만 식욕이 없어 자판기에서 애플소다만 한 캔 뽑았다. 학기 초의 학생식당은 한산했다. 4학년의 상당수는 인턴쉽으로 학교 대신 회사에 나가 있었고 Freshmen이나 Sophomore가 학기 초의 수업에 꼬박꼬박 출석할 거라고 생각하는건 지나친 기대다. 자판기에 등을 기대고 벤자민은 열없이 식당 안을 훑었다. 한가운데의 테이블에서 낯익은 얼굴이 눈에 걸렸다.
“안녕.” 벤자민은 들고 있던 애플소다 캔을 클린트의 식판 옆에 내려놓았다. 클린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벤자민은 맞은편의 의자를 빼내 앉았다. “앉아도 괜찮지?” 클린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너 본 적 있어. 클린트, 맞지?” 클린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벤자민은 재빨리 덧붙였다. “토니 집에서.” 식판을 들어올리던 손이 멎었다. 처음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색의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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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는 가슴을 들썩였다. 마른 웃음이 기침처럼 퍼져나갔다. 토니는 눈썹을 들어올렸다.
"뭐가 웃겨서 웃어?" 토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손을 뻗어 벗은 가슴 위에 얹자 오르락내리락 하는 흉곽의 움직임이 손 끝으로 느껴졌다. 손에 닿는 체온이 따듯했다. 사나웠던 감정이 조금 누그러든다. 어찌됐든 이 모든 것들은 늘 시작으로 돌아갔다.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누그러지는 그 때로.
클린트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우스워서 현실감이 없었다. 클린트는 손을 들어 가슴 위에 놓인 토니의 손을 밀어냈다.
"우스워서요. 전부 너무 웃겨서요." 토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클린트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창 밖의 하늘은 잿빛이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눈발이 점점이 날리기 시작했다. 마이애미와 달리 맨해튼의 겨울은 차가웠다. 저 눈을 시작으로 겨울이 끝나기 전까지 날은 점점 더 추워지기만 할 것이다.
클린트는 천장으로 눈을 옮겼다. 높은 천장의 무늬는 그가 떠나기 전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것들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변하지 않고 늘 그대로인데, 어떤 것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흔적도 남지 않고 변해 사라진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우스웠다. 그리고 슬펐다.
"저는 아니에요, 토니."
슬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감정들은 마치 타인의 그것을 지켜보듯 무감하게 와 닿기도 했다. 앞뒤 없는 말이었지만 토니는 그 영민함으로 클린트의 말이 어떤 것에 대한 대답인지를 깨달았으리라. 토니는 대답이 없었다.
"다 지나간 일입니다. 마치 모르는 사람의 앨범을 보듯... 그때의 일들은 저에게 그 정도 의미밖에 남아있지 않아요."
클린트는 천장의 무늬를 눈으로 헤아리며 말을 이었다. 문양과 문양 사이로 이어지는 시선 사이에 흘러간 얼굴들이 머리를 들었다. 콧수염을 멋지게 길렀던 중년의 신사가, 긴 금발머리의 상냥한 여성이, 붉은 머리칼의 멋진 여성이, 그리고 쥔 것 없이 초라해 속에 품은 감정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던 그 옛날의 클린트 바튼이. 고저 없이 단조로운 억양으로 시를 읊듯 이어지는 목소리는 무색으로 감정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토니가 클린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입을 막으려는 듯 가까이 붙여오는 얼굴을 피해 클린트는 고개를 돌렸다. 토니를 밀어내려 뻗은 손바닥에 그의 입술이 닿아 뜨거웠다. 토니는 클린트의 양 손목을 잡아 내리려는 듯 몇 번 손을 뻗어 클린트의 손목을 스쳤지만 이내 포기하고 행동을 멈췄다. 토니가 얌전해지자 클린트는 토니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었다.
"당신을 봐도 더 이상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요."
토니는 뭔가 말하고 싶은 사람같이 보였지만 이내 화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클린트는 토니가 그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토니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걸 알았다. 그토록 사랑하고 절망해 그의 감정 한 자락이라도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잠들던 밤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원하지 않아도 선명하게 보였다. 클린트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손을 떼고 토니의 얼굴선을 손 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평온하고 조용했다.
"그래도 상관 없다면, 당신이 다시 질리는 날까지는 옆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토니는 클린트의 어깨를 꽉 끌어안으며 몸을 붙여왔다. 클린트는 이번에는 밀어내지 않았다. 토니가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몸에 휘감기도록 내버려둔 채 클린트는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바깥 기온처럼 마음의 온도 역시 천천히 식었다. 눈송이처럼 모든 것들이 천천히 떨어져내려 쌓였다. 그리고 굳어서 얼어붙었다.
언젠가 긴 겨울이 끝나고 햇빛이 더워지면 얼어붙은 눈이 녹을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클린트는 어렵게 찾은 마음의 평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토니의 숨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클린트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는 지금 평온했고, 그리고 행복했다. 그 행복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를 이제 클린트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덧창이 바람에 소리를 내며 가볍게 흔들렸다. 겨울은 이제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춥지 않을 걸 알았기에 별로 겁나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괴로운 겨울은 이제 그의 것이 아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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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던 거 하드 뒤지다 찾아서
더 쓸 거 같진 않아서 올려둠
완결까지 생각했던 글 장면장면 잘라서 써놓았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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