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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님 생일 축하 단편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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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의 이야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다. 우주 정거장 센타우리 A에는 당연히 계절이 없었지만 행성 연합의 공용시에 따르면 그날은 가을이었다. A는 화물관리소에서 일했다. 저녁 9시에 퇴근하면 항상 같은 술집으로 향했다. 화물검역소 옆에 붙어있는 이름도 모르는 선술집은 크기도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있어 늘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 십년 넘게 같은 술집에 드나들다보면 딱히 개인적인 친분을 맺지 않아도 서로의 속사정이 뻔해진다. A가 그 남자를 발견하고 호기심을 가진 건 그래서였다. 그런 우중충한 술집에 앉아 있기에 지나치게 반드르르한 얼굴의 남자는 A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A는 위성이 인력에 이끌리듯 주문한 맥주병을 쥐고 남자의 옆에 앉았다. 인사를 건네자 남자가 슬쩍 돌아봤다.

안녕하시오.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이 동네는 관광객이 잘 오지 않는 곳인데. A라오.

남자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짧게 얼굴을 찡그렸다. 구겨진 미간에서 순간적으로 신경질적인 인상이 드러났다. 서글서글한 인상과 잘생긴 얼굴 밑에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미가 숨어 있는 사람이었다. A는 이런 인상의 사람을 몇 명 알았다. 그 중에서 A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없었다. A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지 않아서였다. 그런 눈을 한 사람들은 쉽게 사람들을 자기 경계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 소수의 운 좋은 자들만이 불가해한 방법으로 그들의 선을 넘어가곤 했다. AA의 세계를, 그들은 그들의 세계를. 오늘은 A와 그들의 세계가 아주 잠깐 겹치는 특별한 밤인 듯 했다. 남자는 바로 표정을 바꾸고는 손을 내밀었다. 눈매가 누그러지자 성마르고 날선 인상은 자취를 감추고 단숨에 눈을 잡아끈 출중한 미모가 그 자리를 메웠다.

안녕하세요. 관광객은 아닙니다만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네요. J입니다.

A가 멀뚱히 손을 쳐다보고 있자 J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손을 거두었다.

죄송합니다. 테란이신 줄 알았어요.

사과할 것 없소. 센타우리 이주 5세대라오. 테란들이 종종 착각하지. 이 동네에선 그런 식으로 잘 인사하지 않소이다.

J가 머쓱하게 웃으며 옷깃을 매만졌다. A는 남자의 옷깃에 붙은 통역기를 알아보았다. 그도 일할 때 종종 사용하는 기계였으나 J의 옷에 달린 것과 같은 고급품은 처음 보았다. 추측컨대 그가 평소 일할 때 사용하는 통역기와는 달리 지연이 거의 없는 제품 같았다. 대화중인 상대가 자신과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A는 남자의 행색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살폈다. 몸을 좀 쓸 줄 아는 사람인 듯 손의 특정한 부분에 못이 박혀 약간은 투박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곱상한 얼굴과 달리 저 손은 마냥 솜방망이 같진 않을 거라고 A는 결론을 내렸다. 옷차림엔 별반 특징이랄 게 없었다. 센타우리 A의 일반 거주민들이 많이 입는 옷과 다르지 않았다. A가 주목한 건 신발이었다. 보통 옷차림은 쉽게 바꿔도 신발은 그렇지 않다. 은밀하게 시선을 내려 남자의 신발을 흘깃대며 A는 자신이 추리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30년간 한 직장을 다니며 단 한 번의 모험이나 일탈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온 인생이다. A는 자신이 고전 영화 속의 스파이라도 된 것처럼 낯선 대화 상대의 행색을 몰래 살피며 추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밀스러운 기쁨을 느꼈다.

결론은 내렸습니까?

J의 말을 듣고 심하게 사레가 들린 건 그 때문이었다. 콜록대며 바 위를 허우적허우적 더듬는 A에게 남자는 조용히 물컵을 밀었다. A는 물컵의 내용물을 반 넘게 비우고서야 진정했다.

크흠. 무슨 말씀이신지 원.

아까부터 계속 제 신발을 살펴보고 계셨잖습니까. 안된 일이지만 스파이 임무를 수행하시려면 조금 더 능숙해지셔야겠어요.

A는 놀람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거주민 대부분이 화물에 관련된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센타우리 A에서 고전 영화를 즐기는 A의 취미는 괴짜 취급을 받았다. 그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J는 고전에 취미가 있는 것 같았다. A는 재빨리 바텐더를 불러 새 잔을 주문하고 바에 바싹 붙어 앉았다.

고전 영화를 아시오? 스파이나 영웅들이 등장하는 거 말이오.

남한테 취미라고 소개할 정도로는 봤죠.

J가 씩 웃었다. 눈가에 주름이 잡히며 얼굴 전체가 미소를 그렸다. A는 순간 말을 잃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생긴 남자였다. J는 아직 반 정도 남은 자신의 잔을 가볍게 흔들며 물었다.

그래서 보시기에 제 정체는 어떤 것 같습니까?

A는 목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머리카락이 흥분으로 쭈뼛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바에 턱을 괸 채 A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A는 잔을 양손으로 꼭 쥔 채 심호흡을 했다. 그는 이 게임을 즐기고 싶었다. 섣부른 대답으로 J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J의 파란 눈은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당신이 목에 차고 있는 통역기. 그건 개인이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오. 구할 수는 있지만 불법적인 수단에 호소해야 하지. 그 정도로 비싼 물건을 찾아볼 수 있는 단체는 한 곳밖에 없소.

호오.

보통 이유가 있어 행색을 위장하는 여행객들은 그 동네에 맞춰 옷을 갈아입소이다. 당신은 여행자는 아니라고 했지만 이곳 거주민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차림을 하고 있소. 당신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여행객은 아닐 테니 뭔가 목적을 가지고 여기 온 사람인 거겠지. 종족은 테란일 테고.

재미있군요.

헌데 보통 위장 목적으로 그 지역의 유행에 맞춰 옷을 갈아입는 경우에도 신발까지 위장하긴 좀 힘들단 말이오. 신은 새 것을 사서 신으면 발에 상처를 내거나 피로해지기도 쉽고 옷처럼 크기가 맞지 않아도 대충 걸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잖소. 해서 보통 옷은 갈아입더라도 신발은 자기 것을 신는데.

하하.

당신 신발은 새 거로군요. 심지어 이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발이오.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지. 당신 옷은 재조합기에서 복제한 거요.

놀랍군요.

P 연방 소속 함선이 임시 정박 중이라고 들었소. 이래봬도 화물관리소 소속 공무원이라.

JA의 말을 들으며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A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 큰 함선의 함장씩이나 되는 양반이 왜 이런 데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거요?

대화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J의 눈에 감탄의 빛이 돌았다.

제가 E 함선 소속 승무원이라는 것까지는 쉽게 유추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좀 놀랍군요. 제가 함장인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A는 어깨를 으쓱하며 잔을 든 손으로 J의 통역기를 손가락질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개인이 구하려면 제법 골치 아플 정도의 고급품이오. 복제가 불가능하지. 면대 면으로 외교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잘 지급되지 않는 물건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J는 미소를 지었다. A의 말과 달리 P 연방 내부에서 이런 통역기는 그렇게까지 귀한 물품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A의 말이 틀렸지만 딱히 정정해줄 생각은 들지 않아 J는 그저 계속하란 의미로 눈짓을 보냈다. A는 말을 이었다.

저런 함선이 여기 정박하는 일이 그렇게 드문 건 아니오. 여긴 별별 함선이 다 오가지. 헌데 임시 정박 중이라고 해서 승무원들이 아무 일 없이 정박지에 나다닐 수 있냐, 그건 아닐 거란 말이오. 자유롭게 바깥을 오갈 수 있는 승무원이라고 해 봤자 함장이나 부함장 정도겠지. 그리고.

A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흥분이 피를 데웠다. 그는 잔에 남아 있는 내용물을 단숨에 비운 뒤 말을 이었다.

그 유명한 행성 연방 소속 함선 E의 부함장에 대해서는 이런 외진 곳까지도 소문이 난다오. 얼굴은 본 적 없지만 V행성 출신이란 얘기는 들었지.

합리적이네요.

A는 약간의 뿌듯함과 수줍음을 동시에 느꼈다. 초등공립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처음으로 에세이를 칭찬받았을 때와 흡사한 간지러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났다. 그 나비는 너무도 연약하고 부드러워 A는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 A는 간질거림을 씻어내기 위해 다시 새 잔을 주문하고 J에게 몸을 돌렸다.

그럼 이제 잘생긴 양반이 내 질문에 대답할 차례구만.

그런 약속도 했었던가요?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상관없소. 하지만 보통 내 경험상 이런 바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을 상대를 바라더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말이오.

…….

J는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들고 있는 잔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모습이 아니었다면 AJ가 여기 정말 앉아있는지 확인해 봤으리라. 바의 어두운 주홍빛 조명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가운데 애무하듯 잔의 테두리를 둥글리는 J는 현실감이 없을 만큼 눈이 부셨다.

긴 침묵 후에 J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전 영감님이 오시기 전까지 제가 얼마 전에 겪은 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A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의 온 신경은 J의 입술에 쏠려 있었다. 얼마나 극도로 집중하고 있었는지 J의 입술 주름이 몇 개인지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가요.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지금 제 함선은 저희 머리 위에 정박해 있습니다. 우리는.

J가 피곤한 기색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이걸 해결하려고 항해 중이기는 한데. 어디로 가야 할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아니, 아니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여전히 제가 겪은 게 무슨 일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상한 사람 같나요?

전혀.

하하.

J가 메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A는 곁눈질로 훔쳐본 얼굴에서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J의 웃음은 짚덤불 위로 쓰러진 나무 등걸이 불러일으킨 먼지구름처럼 서서히 옅어졌다.

영감님 말씀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

얘기를 하고 나면 저도 제가 겪은 일이 조금 더 이해가 갈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말하면서 정리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괜찮다면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이야기 값으로 내 한잔 사리다.

바텐더를 부르려는 AJ가 제지했다. 잘생긴 얼굴에 어두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A는 잠시 움찔했다. J의 얼굴에 걸려 있던 음울한 표정은 뜨거운 불에 데거나 날카로운 것에 찔린 것처럼 무방비하게 있던 사람을 펄쩍 뛰어오르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A를 제지하고 대신 손을 들어 바텐더를 부른 J가 말했다.

아니오. 제가 한잔 사죠. 이야기를 들어 주시는 값으로요.

아니, 그럴 필요까진.

제가 사게 해 주세요. 제 이야기를 듣고 나면.

J가 또다시 A의 말을 가로막았다. A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J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J의 눈은 분명 채도 높은 파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간적으로 그 눈 안에서 뭔가 어두운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터무니없이 검고 어두운,

아마 저한테 얻어 마시길 잘 했다고 생각하시게 될 겁니다.

거울 같은 것을.

J의 이야기

 

1.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B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영감님은 친구가 있으십니까? 그냥 친구 말고, 가령영감님에게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을 부탁할 수 있을 만한 친구 말입니다. , 이런 저녁에 여기 혼자 앉아있는 걸 보면 알지 않냐고요글쎄요. 그렇게 말씀하시기엔 아까 들어오실 때 꽤 여러 분에게 눈인사를 하시는 걸 봤거든요. 아무래도 직업 특성상 시야가 넓어요.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닌데 그렇게 됐네요.

다시 얘기로 돌아가서. B는 제 친구였습니다. 죽었냐고요? 하하. 아뇨. 이건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누군가가 행복해진 얘기에 가깝죠. 그게좀 이상하게 보일 뿐이구요. 아뇨, 다른 사람들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저에게는 아주 이상하게 보였는데. 그런데 어디가 이상한지 잘 모르겠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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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친한 친구 이야기를 꺼낸 건 B가 제 가장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제가 만약 결혼한다면 신랑 들러리를 맡길 거고 아이를 낳는다면 대부를 부탁할 그런 친구 말입니다. 보통은 어릴 때 만난 친구가 인생을 함께 하는 친구가 되는 것 같던데 저희는 좀 늦게 만났어요. 제가 스물두 살 때, B가 스물여덟 때였죠.

저는 친구가 많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도 연락하고 있는 어릴 때 친구가 거의 없죠. 아무래도 하는 일이 지구를 오래 떠나있는 일이다 보니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계속 연락하고 지내기가 어렵더군요. 지구에 돌아가면 친구들은 저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어 있곤 해서요. 지금은 아직 젊으니까 일이 년 정도지만 앞으로도 계속 벌어지겠죠. 우주를 택한 자의 숙명이죠. 그래서 S 소속 직원들은 다 사이가 좋아요. B는 그중에서도 좀 각별한각별한 친구였습니다.

우린 S 산하 아카데미에서 만났습니다. 둘 다 특채였고, 같은 셔틀을 탔죠. 맹세코 그렇게 꼴사나운 만남은 B의 인생에서도 제 인생에서도 다시없었을 겁니다. 우린 나란히 꼴찌로 도착해 마지막 셔틀을 탔어요. B는 노숙자 꼴을, 저는 전날 밤에 있었던 술집에서의 다툼 덕에 이리저리 얻어터져 피멍이 든 꼴을 하고 있었죠. 그 셔틀에 특채는 저희 둘뿐이었어요. 나머지 생도들은 전부 공채였기에 이미 입소 준비를 마치고 제복을 깔끔히 입고 있었던 가운데에서 섞일 수 없었던 건 저희 둘뿐이었습니다. 자연히 대화를 주고받게 됐죠. 지금도 여전히 B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초면에 생면부지인 사람에게 대뜸 나 너한테 토할지도 몰라, 라고 말하는 인간은 B밖에 없을 거예요.

저는 이 셔틀이 꽤 안전할 거라고 한 마디 대꾸했다가 우주가 얼마나 위험하고 끔찍한 질병의 온상인지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는 B의 일장연설을 들어줘야 했습니다. 그때는 좀 이상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B는 취해 있었고, 술을 마시고 있었죠. 그게 입소 전 마지막 음주였다고 그러더군요.

저한테는조금 문제가 있었습니다. 흔한 문제들이었죠. 하지만 당사자가 되면 어떤 문제든 그건 더 이상 흔한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내 문제일 뿐인 거죠. 제 가정환경에는 문제가조금 있었어요. 불만도 있었고. 십대와 이십 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쓰레기처럼 살았어요. 술 마시고, 싸움하고, 대충 눈 맞는 사람 아무하고나 자고 다음 날은 전날 했던 일을 똑같이 반복하고. 그러다가 누가 절 찾아왔는데넘어가죠. 지금은 그분에 대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네요. 아무튼 계기가 있었어요. 지구 바깥에는 내 자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 제 방황은 애초에 제가 있을 자리나 방향을 찾지 못해서 시작되었던 거였기 때문에 네 자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얘기는 꽤괜찮게 들렸어요. 저는 그분의 말씀에 따라 S 연합에 투신했습니다. 헌데 거기서도 내 자리가 있을 거란 확신은 얻을 수 없더군요.

성적을 유지하는 건 의외로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A는 자네, 주변에서 재수 없다는 말 많이 듣는 편 아닌가? 하고 물었다. J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니까요.)다른 문제가 계속 절 찾아왔습니다. 저에게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앞서 자신을 너무나 지나치게 증명한 아버지가 계셨거든요.(J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A는 약간은 건방질 만큼 자신만만한 그 미소가 J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S 중앙본부와 모든 산하 아카데미 중앙 위령비 꼭대기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아버지시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름값이 지나치게 주목을 끌었기 때문에저한테도 자신을 증명해 보이라는 요구가 쏟아졌어요. 대부분은 둘 다 얼굴에 멍 몇 군데를 달고 코에 휴지를 꽂는 걸로 넘길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믿지 못할 녀석이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어요. 우스운 얘기죠. 절 알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 저더러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하다니.

B. 정글 같던 아카데미에서 저에게 처음으로 신뢰가 뭔지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2.

 

B는 저랑 같은 방을 배정받았습니다. 당연한 거였는데 그때는 그게 엄청 기뻤었죠. , 무슨 얘기나면같은 기수에 두 명의 특채 입학생이 있다면 당연히 한 방을 쓰도록 하는 게 원칙입니다. 특채 입학생과 공채 입학생이 한 방에 있다면 무슨 싸움이든 생길 소지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땐 그걸 모르기도 했고저는 제가 운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순진했죠? 그때 저는 겨우 스물 둘이었거든요. 안면이 있는 사람이 한 방이 된 게 기뻤어요.

우리는 금방 가까워졌습니다. 거의 모든 활동을 함께 했죠. 그와 저는 속한 부서가 달랐지만 그게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어요. 부서가 같았으면 문제가 됐겠죠. 저희 둘 다 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니까요. 어쨌든 저희는 속해 있던 학생들 틈에서는 꽤 여유 있는 편이었어요. 그는 이미 전문의로 몇 년간 민간 병원에서 일하다가 S 소속 아카데미로 진로를 바꾼 경우였고, 저는 뭐아까도 말했다시피. 성적을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요.

1학기를 그럭저럭 보내고 2학기에 돌입했는데 학기 초에 일이 터졌습니다. 제가 폭력사건에 휘말렸죠. 물론 걸어오는 싸움을 거절하는 성미가 아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사건만큼은 정말로 제가 한 일이 아니었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토요일이었던 거 같은데, 아카데미 앞에 있던 작은 술집 한 곳에서 패싸움이 났다고 들었습니다. 몰려서 싸우다가 누군가가 휘두른 의자에 두 명이 잘못 맞았습니다. 한 명은 두개골 골절, 다른 한 명은 척추 골절. 두개골 골절상을 입은 쪽은 뇌압 상승 끝에 나흘 만에 사망했습니다. 다른 한 명은 하반신불수가 됐죠. 의체 시술로 신경을 복구하는 시도를 할 수는 있었지만 재활을 마치고 아카데미에 복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전대미문의 폭력사건이었는데 그 가해자로 지목된 게 저였습니다.

? 하하. 이런. 당연히 아니었죠. 저는 그때 샌프란시스코에 있지도 않았어요. 삼촌이 한 명 있었는데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유일한 친척이었어요.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 제 후견인이기도 했고요. 그 사람이 위독하다고 연락이 왔었거든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지구에 있는 살아있는 친척은 저 뿐이었고 병원에서는 삼촌이 저를 보길 원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주말을 이용해 아이오와에 갔었습니다. 금요일 일과를 마치고 바로 출발했죠. 제가 가해자로 고발됐다는 사실은 주말이 지나고 학교에 복귀해서야 알았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제가 제출한 기차와 셔틀 이용 기록, 그리고 병원 방문 기록에도 불구하고 폭력사건 진상조사위원회에서는 제 말을 쉽게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동하면서 찍힌 CCTV 기록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이유였어요. 정말 이상하죠. 아이오와면 몰라도 샌프란시스코는 30센티미터 간격으로 카메라가 한 대씩 깔려있는 곳이었는데. 아무튼저는 떳떳했기에 무죄를 주장했죠. 그런데 평소 절 미워하던 녀석들끼리 짜기라도 한 건지 그날 술집에서 절 봤다는 증언이 계속 이어졌어요. 제게는 다른 증거가 없었고난처한 상황에 처했죠. 아침에 일어나 기숙사를 나서면 온 사방에서 수군거림이 쏟아졌습니다. 우유팩 같은 게 날아와서 머릴 맞춘 적도 있었고요. 제가 그날 밤 그 술집에서 의자를 휘둘렀다고 온 아카데미 학생들이 믿는 것 같았어요.

B, B만 제외하고요.

 

3.

 

B는 제가 기소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저한테 딱 한 가지만 물었습니다. ‘J. 네가 했냐?’ 저는 아니라고 했죠. 그게 다였습니다. B는 저에게 말하지 않은 채 여가시간을 쪼개 제 무죄를 밝혀줄 증거를 찾기 시작했죠.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에 카메라가 몇 개 있는지 아십니까? 2천 개가 넘어요. 정확히는 2478개입니다. B는 매일 수업이 끝나면 기술부의 친구를 닦달해 만들어낸 안면 인식 프로그램을 들고 기차역으로 갔어요. 경찰을 대동해서요.

상당한 이유가 있고 경찰을 동행한 경우 공익을 위해 역장의 권한으로 영장 없이 폐쇄회로 카메라 영상을 열람하도록 허가할 수 있습니다. 전 몰랐습니다. B가 알아냈죠. B는 주 법전을 뒤져 그걸 알아내고는 인근 경찰서에 민원을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경찰서에 들러 경관에게 동행을 요청해서 기차역에 갔죠. 카메라 2400대가 저장한 영상을 확인하는 데에는 꼬박 2주일하고 닷새가 걸렸습니다. 그리고 B는 결국(J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영상들 중 몇 군데서 제 얼굴이 찍힌 걸 찾아내고야 말았죠.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우연의 일치지만그 날 제가 유달리도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사각으로 많이 다녔더군요.

다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 없겠죠. 저는 불명예 퇴학을 면했고, 그 과정에서 B가 저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게 됐습니다. B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과 수석에 집착하는 녀석이었기에 중간고사를 코앞에 두고 2주나 저를 위해 할애했다는 걸 알고 제가 느낀 기분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였어요. B한테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물었더니 B가 그러더군요. 네가 안 그랬다며.

맞아요. 제가 아니었죠. 하지만 그걸 믿어준 건 B뿐이었어요.

 

4.

 

그리고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졌어요.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저는 정식으로 아카데미를 마치지 못했어요. 모종의 사건 덕에 조금.(J는 턱을 조금 든 채 가슴을 펴 보였다. 약간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자신만만한 그 자세는 마치 입대 독려 포스터 속의 모델처럼 J에게 잘 어울렸다.) 빠르게 승진했거든요. 그 와중에 저를 S 연합에 들어가도록 도와주신 분이 돌아가시기도 했고, S 연합 본부가 습격당하는 일도 생기고몇몇 친구를 잃었죠. B는 계속 제 옆을 지켰고요.

B의 감정을 눈치챈 건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어느 순간부터 알고 있었던 것만 기억나요. 그런 것들이 있잖습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알게 되는 것들.

B는 저를 좋아했습니다. 어떻게 알았냐고요? 글쎄, 그냥요. 그냥 알았어요. 그런 건 타고나는 재능 같아요. 누군가가 자기한테 품은 감정을 빠르게 알아채는 거 말이죠.

B는 저를 위해 어떤 수고로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주변인들에게도 늘 그런 녀석이어서 처음에는 그저 원래 그런 성격인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알게 되더군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친구에게는 해주지 않는 일들이 있다는 걸요. 그걸 알았을 때 어땠냐고요? .

 

겁이 나더군요.

 

그 전까지는 한 가지만 조심하면 됐었으니까요. 주변에 절 미워하고 의심하는 사람들만 있었을 때는 오히려 지내기 편했습니다. 어떻게든 그 사람들을 실망시키기만 하면 됐었죠. 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에게서 다른 사람을 찾는 자식들을 다 뭉개줬어요. 미친 짓거리를 몇 번 선보이고 나면 그 전에는 G의 아들이었던 취급이 미친놈 J로 바뀌더라고요. 차라리 그게 나았습니다. G의 아들로 보이고 기대 받는 것보다는 그냥 미친 새끼 J가 되는 게. 그건 절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어도 마찬가지였죠. 어쨌든 누군가가 저를 G의 아들로 보고 있다면 그 사람을 대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 기대가 흔적도 남지 않게 밟아 뭉개주는 거였어요. G의 아들로 대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좋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게 대수롭게 느껴지지 않았죠. 재미있다면 모를까.

그런데 B가 절 좋아하는 걸 알게 된 겁니다.

 

5.

 

B, 아마도 제 형 S를 제외하고 제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좋아하게 됐던 사람일 겁니다. 저는 평생 싫어하는 사람을 실망시키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난 거죠. 실망시키면 안 되는 사람이.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도 하지만그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요. 살면서 처음으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이 생겼는데 제가 아는 건 오로지 효과적으로 사람을 실망시키는 방법뿐이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저는 한동안 B를 많이 실망시켰어요. 정말로많이요.

B가 버틴 건(J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저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 바보 같은 녀석. 한 번 다녀오기까지 한 주제에 그렇게까지 대책 없이 순정적일 건 또 뭔지.

 

6.

 

이쯤에서 고백해야겠군요. 저는 그때까지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물론 섹스는 많이 했죠. 하룻밤 잘 곳이 필요하거나 혼자 자기 싫을 때는 같이 잘 사람을 찾는 게 가장 빨라요.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자기 침대 옆자리를 내줄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성자들이죠. 저 같은 양아치들이 그런 성자들의 보금자리를 약탈하는 거고요. 하지만 데이트는그건 좀 다른 거였죠. 그런 식의 감정적인 교류는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룻밤 상대를 찾는 거랑 그건 너무아시겠죠. 너무(A는 조용히 대꾸했다. 다르지. J는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맞아요. 다르죠.

저하고 B 사이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그중 가장 큰 사건은 따로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할 수가 없는 거 이해하세요. 기밀이거든요. S연합의 내부 사정이 얽힌 일이라B가 저를 위해 아주, 아주, 아주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고만 해두죠. 저는 그때 굉장히 많이 다쳤었는데오랫동안 병상에서 보내고 나서야 제가 병석에 누워있는 동안 B가 저를 위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게 됐습니다. 뭘 했는지는 말 못 하지만그 일로 B는 경력을 망칠 뻔했어요. 제 부함장SB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았으면 아마 그렇게 됐을 겁니다.

그 전까지 우리 관계는 좀 아슬아슬했어요. 저는 언제고 B가 저에게 실망했다고 말하고는 저를 등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B를 휘두르려고 드는 걸 멈추지 못했습니다. B가 저를 떠난다고 생각하면 너무 무서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무서워하면 할수록 B에 대한 태도가 더 심해졌죠. B가 제 통제 하에 있고 저를 좋아하기 때문에 제 말에 휘둘린다는 걸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B는 단 한 순간도 저에게 확신을 주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J는 손가락 끝으로 잔 테두리를 빙글빙글 돌렸다. J는 처음으로 옆에 앉은 청년이 나이 들어 보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B가 저를 위해 못할 게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까 오히려 덜컥 겁이 났어요. 그렇게까지 한 B에게 저는 해준 게 없었잖아요. 제 말은그러니까. 계속 실망시키기나 했지.

B는 더 이상 저에게 빚진 게 없었어요. 더 줄 것도 없을 만큼, 남은 게 있긴 할까 의심스러울 만큼 저에게 다 쏟아 부었죠. 우스운 얘기지만태어나서 그렇게 절 사랑해준 사람은 B가 처음이었어요. 제 어머니도 안 그러셨는데 하물며 어쩌다가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녀석이 그러니까, 그게 더 겁이 나더군요. B가 이제 할 만큼 했다며 언제든 홀가분하게 저를 등질까봐. 너처럼 고약한 녀석 뒤치다꺼리 더 이상은 못 하겠다며 두 손 두 발 다 들고 털어버릴까봐.

그래서 그만 실수를 했어요. 최악의 실수였죠. 하면 안 되는 실수요.(J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B의 커리어도, 저희 일도 어느 정도 정상 궤도로 돌아왔을 때 저는 B한테사귀자고 했습니다. 네가 날 좋아하는 거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한번 만나보자고 했어요. 제 절친한 친구, 절 위해 뭐든 감수해왔던 5년 지기 친구한테요.

 

7.

 

문제는 오래지 않아 드러났습니다. 한두 가지가 아니었죠. 다행이에요, A. 영감님이 모르는 사람이라서. 아는 사람에게는 앞으로도 절대 이런 얘길 털어놓지 못할 겁니다. 여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요. 아는 사람에게 털어놓기엔 정말이지너무 부끄러운 이야기죠. 안 그렇습니까?

제 삶에 문제가 없었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사실 한 번에 한 가지도 아니었고B와의 데이트는 그 모든 문제들을 한 데 모아 제곱으로 부풀린 것 같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간이 악몽이었죠. 저는 시도해본 적 없을 뿐 제가 동성과 데이트를 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있더군요. B의 성별이 아니라 상대가 B라는 게 문제였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지만, 아무튼 그랬어요. 첫 번째 데이트는 대화했던 시간보다 침묵이 더 길었어요. 열 살짜리 꼬맹이들끼리 데이트를 해도 그런 식으로는 안 했을 겁니다. 최악이었죠. 서로 얼굴도 제대로 마주보질 못했어요. 지옥 같은 네 시간이 지나 B를 방 앞까지 데려다 줬을 때 B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한테 키스를 했어요. 저를 붙잡고 한참 동안 망설이면서 바닥만 쳐다보다가 했던 게 그 키스였죠. 저는 B를 밀쳐냈습니다. 때리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너무 놀라니까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더군요. B가 저한테 키스할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거든요. 그때까지 B와 사귄다는 걸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막연하게 B가 원하는 걸 해 주면 떠나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정말이지 천하의 개자식이었죠.

정신을 차려 보니 B는 바닥에 나자빠져 있었어요. 놀라서 허둥지둥 사과했지만B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겠어요. 입술이 찢어져서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B는 괜찮다고 하더군요. 저는 멍청하게 그 말을 믿었죠. 저는 B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을 더듬으며 인사를 하고 피 흘리는 B를 거기 내버려둔 채 제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B에게 방에 들어왔다 가라고, 다친 곳을 치료하고 가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고요. 이십 대 후반과 삼십 대 중반 남자 두 명이 만나서 그딴 데이트를 한 겁니다. 같이 홀로그램 영화 보고, 체할 것 같은 기분으로 서로 눈 피해가며 밥 먹고, 마지막 키스 대신 주먹질을 날린 데이트.

대체 그런 제가 어디가 좋았는지.

 

8.

 

사귄 기간은 꽤 길었습니다. 사실 사귄 기간이라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B가 버틴 기간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B는 번번이 저한테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꽤 오래 버텼습니다. 5개월이나 계속 만났으니까요. 다섯 달이라니상상이 가시나요?(J는 어깨를 떨며 킬킬 웃었다.) 저 같았으면 키스를 거절당한 자리에서 바로 차버렸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B는 그러지 않았어요. B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죠. 나중엔 그걸 가지고도 B를 원망했어요. 차라리 B가 이걸 끝내자고 하면 이 짓거리를 더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 B가 헤어지자는 소리를 안 해서, B가 버텨서 우리가 이렇게 된 거라고요. 전 별별 이유를 다 동원해 B를 미워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말 B가 저를 등질까봐 겁에 질려 있었고요. 그냥정상이 아니었던 거예요. 매일 미칠 것 같은 기분으로 B를 만났다가 긴장이 풀리면 심한 말을 퍼붓기를 반복했어요. B는 그 모든 걸 감내하면서 저한테 화 한 번 내지 않았습니다. B가 돌아가고 혼자 남아서 긴장이 풀리면 저는 제가 오늘도 나쁜 새끼가 됐다는 생각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어요. 그 울화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 다음 날 만나는 B에게 고스란히 돌아갔죠.

이 이야기의 가장 나쁜 부분이 어디인지 짐작하시겠습니까? 5개월 동안 저희가 단 한 번도 섹스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섹스뿐만이 아니라 키스도 스킨십도 없었죠. B가 시도했던 첫 번째 키스 이후로 저는 B와 닿으면 역겨움을 느꼈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초조함이나 불안함에 더 가까웠던 것 같긴 한데어쨌든 B가 닿으면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그걸 B에게 그대로 말했죠. B는 괜찮다고 했어요. 원하지 않으면 강요할 생각 없다고. 네가 편안하게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요. 저는 B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조차도 B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성자인 척 할 거면 왜 날 놔줄 생각은 안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죠. 누가 누구를 원망했던 건지.

헤어진 후에 오랫동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차라리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면. 그 정도로만 덜 비겁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오.

 

9.

 

헤어지게 됐던 건 사소한 계기였습니다. B와 만나던 기간 막바지에 저는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남들 앞에서는 예전보다 더 쾌활하고 활기차게 굴었지만 혼자 있거나 B와 함께 있을 때면모든 게 다 싫었어요. 그냥 다 고통스럽더군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함선의 함장은 정신적으로 부적격하다는 판정을 받으면 더 이상 함장직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의사를 찾아가는 게 좋았겠지만 제 꿈이었던 5년 탐사 도중이었고, 기껏해야 친구 한 명을 잡아두려고 함장직을 잃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죠. 그때는 이미 스스로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만한 상태였던 겁니다.

저는 불안정한 정신에서 오는 고통을 전부 B에게 풀었습니다. B를 학대하는 것만이 제가 버틸 수 있는 방법 같았고, 그래서 그렇게 했어요. B와 함께 식사를 하며 이것저것 사소한 문제에 트집을 잡아 제멋대로 퍼부어대면 B는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면 기분이 조금 풀렸죠. 그러면 약간 풀어진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가는 겁니다. 잠들기 전까지 B에게 별 말을 다 했어요. B는 거의 대꾸하는 법이 없었죠.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감정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무슨 대화를 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그 시기의 기억들은 사실 거의 다 그렇습니다. 흐릿하고, 진짜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지 않고요. 상담사가 심한 스트레스는 기억 장애를 유발한다고 하더군요. 거의 매일같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으니 그날도 그랬을 거예요.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눈물이 터졌다는 겁니다. 울고 싶은 마음도, 우는 취미도 없었는데물을 담아 놓은 비닐봉투가 터진 것처럼 그냥 눈물이 터졌어요. 입을 다문 채 제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B가 제 눈물을 보고 사색이 되었던 게 기억납니다. 꼭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쪼그려 앉아 몇 번이고 말하더군요. J,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제발 울지 마. ?

그리고는 자기가 더 울 것처럼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서는, 욕심 부려서 미안하다고, 너는 이제 할 만큼 했고 절대 원망하는 일 없을 거라고 그러더군요. 그때 저는 꼬일 대로 꼬여 있었고그의 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천하의 머저리답죠. 하하.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는 동안 B는 제 앞에 바짝 붙어 앉아 제게 거듭 사과했어요. 망쳐서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네 친구를 뺏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어야 하는데.

하긴, 그때 알았다고 한들 뭐가 달라졌을까요. B는 자기가 한 말을 어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늘 그랬죠. B가 믿는다고 하면 그건 말 그대로 제가 입 밖에 낸 모든 말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다 믿겠다는 의미였습니다. B가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죠.

B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네가 안 그랬다며. 하고 무심하게 절 지나쳤던 순간처럼 두 번 돌아보지도 않았죠.

 

10.

 

B는 그 다음날부터 마치 5개월간의 일이 없었던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귀기 전과 똑같은 말투로 저에게 말을 걸었고, 사귀기 전과 비슷한 빈도로만 저와 함께 식사를 했으며 사귀기 전과 마찬가지로 개인 시간을 혼자 보내기 시작했죠. 하루아침에 벌어진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건 제 쪽이었어요. 저는 B를 쫓아가 붙들고 복도 한복판에서 무슨 꿍꿍이냐며 윽박지르기도 했고 이런다고 내가 그냥 넘어가줄 줄 아냐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BB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어요. 시종일관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죠. 제가 사귀던 중에 있었던 일을 끄집어내며 고함을 지르면 B는 얼굴을 확 찡그리면서 제 말을 자르고는 저한테 그랬습니다. 너 설마 약 하냐, J? 네놈이 무슨 말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얘기 다 했으면 이만 가본다. 시간 남으면 상담사한테나 좀 가 봐. 네놈은 프로작이 좀 필요해 보이니까. 그리고 두 번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떴죠.

자기 함선의 함장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건 B밖에 없었을 겁니다. 혼자 남은 저는 어느 쪽이 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한참 동안 생각을 곱씹어야 했죠. 달라진 일상에 적응하기까지는 3주가 넘게 걸렸습니다. 헤어진 지 한 달이 넘어서 저는 그제야 모든 게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B가 저를 놔준 거였죠. 얼마나 기쁘던지.

그 다음부터 B를 대하던 제 태도도 변했을 거란 사실을 짐작하셨겠죠. 사귀던 동안의 B는 제게 감정을 강요하는 끔찍한 괴물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빌어먹을 짓거리가 끝나고 나니 다시 제 절친한 친구,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로 되돌아온 겁니다. 죽었던 친구가 살아 돌아온다면 어떻겠습니까?

맞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친구를 다시 찾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저는 사귀기 전보다 더 자주 B를 찾았고 B와 부대끼려 들었죠. B에 대한 제 감정은환희와 죄책감 사이에 매달려 있는 추 같았어요. 죄책감을 심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B가 다시 제 친구로 돌아왔다는 게 미치도록 기뻤죠. B가 그때마다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고요.

 

11.

 

저한테 내색하지 않았을 뿐 B도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사실 저보다 더 힘들었겠죠. B는 제가 사귀자고 하기 전까지 저한테 고백할 생각이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었으니까. 그는 제가 안다는 것도 몰랐어요. 알았다면 제 앞에서 그렇게 태연하게 친구 노릇을 하진 못했을 겁니다. B(J는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그는 한동안 술잔을 바라보며 침묵했다.)B한테는 자기 자신보다 제가 먼저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까지 저질렀겠죠. 바보 같은 자식.

B가 있는 지옥은 제가 있던 곳과 비슷했지만 저와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느끼는 고통을 말하고 화풀이할 상대가 있었지만 B에게는 없었다는 겁니다. 5개월간의 일을 없던 시간으로 치부하기로 마음먹은 건 B였기 때문에 제가 그 이후에 B에게 한 행동이 그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든 그는 털어놓을 데가 없었어요. 도망칠 곳도 마찬가지였고요. 진짜 기가 막힐 노릇이죠. 오로지 선의에서 비롯된 이타적인 행동이 사람을 그런 지옥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게 말입니다. B가 사귀자는 제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절 좋아해서가 아니었어요. 절 걱정해서였죠. 제가 B를 볼 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불안해하고 있는지 그는 알았던 겁니다. 그게 제 불안을 잠재워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더군요. 정말 멍청한 자식 아닙니까? 누가 남한테 그렇게까지 합니까. 아무도, 아무도 저한테 그렇게 해준 사람이 없었는데. B를 제외하고는그 누구도요.

 

12.

 

B그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겉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사실은 꽤 감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히 마음이 여렸고, 태생적으로 정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의사라는 사명 자체가 그렇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B는 그 정도가 심했어요. 너무 낯간지러워서 B에게는 한 번도 그렇게 말해본 적 없지만B는 말하자면, 성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전의 삶을 버리고 S 연합에 도망치듯 투신했던 이유를 생각하면 더 말할 나위도 없죠. B는 본래 소아과 의사였는데, 담당했던 환자한테 너무 마음을 쏟아 가족이 지쳐가는 걸 몰랐다고 합니다. 신혼을 한참 즐겨야 할 때 그에게 배정된 환자는 희귀 불치병을 앓고 있었어요. 그 때문에 가장 실력이 좋고 우수한 의사였던 B에게 배정이 되었죠. B는 그 환자를 2년 넘게 치료했어요. 2년간 B에게는 밤도 낮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환자만이 있었죠. 그렇게 정성을 쏟았는데 그 아이가 기적처럼 완치됐으면 참 좋았겠지만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었습니다. 환자의 상태는 꾸준히 나빠졌어요. B는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죠. 시도해보지 않은 치료법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필연적으로 많은 공부, 많은 연구와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그런 연명조치들이요. 그렇게 매달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2년 반을 넘기지 못하고 결국 죽었습니다.

완전히 무너져 집으로 돌아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아내의 이혼 요구였어요. B는 아무 조건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전부 아내에게 내줬습니다. 맨 정신일 때는 농담거리로 웃으면서 뼈만 남기고 싹 털렸다고 투덜거리곤 했지만 만취하면 그는 진심을 털어놨어요. 잡을 자격이 없어서 잡지 못했다고 했죠. 자긴 항상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기만 한다고. 아내에게 전 재산을 넘기고 결혼생활을 끝낸 직후에 고향집에서 부고가 왔대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었죠.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병원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고 하더군요. S 연합에 자원하기 전까지 쭉,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로요.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 그게 B의 트라우마였어요. 고작 이십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젊디젊은 나이에 차례차례 사랑하던 사람을 전부 잃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B는 활짝 웃는 일이 거의 드문, 늘 인상을 쓰고 있는 험악한 남자였지만표정과 달리 퍽 무른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잃는 게 무서워서 몇 달간 아무하고도 세 마디 이상을 섞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울면서 술만 마셨을 정도로요. B가 제 학대를 견디면서도 선뜻 헤어지자는 말을 못 하고 지지부진하게 관계를 끌어갔던 이유를저는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그는 그냥저 같은 개차반도 잃는 걸 견딜 수 없었던 거예요.

관계를 정리하고 거의 반년 간 B는 서서히 무너져 갔습니다. 티 나지 않게, 그러나 확실하게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저 때문이었죠. 제가 나아지면 나아질수록, B를 예전처럼 대할수록, 그와 함께 보내고 싶어 할수록 그는 점점 더 나빠졌어요. 가장 나쁜 건(J는 목이 메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힘겹게 마른침을 삼켰다. A는 바를 가볍게 두드려 듣고 있다는 표시를 했다. 그는 이 잘생긴 청년에게 동정심을 표하고 싶었지만 J가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걸 어디에도 드러내선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그는혼자 버텼어요. 꾸역꾸역. 하지만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죠.

 

12.

 

B한테는 S연합에 입대하기 전에 알콜 문제가 있었어요. 심하진 않았다고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B가 한 번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죽을 뻔했던 걸 심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않잖습니까. B가 술을 끊고 S 연합에 투신한 것도 알콜 문제로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다가 퇴원한 직후였습니다. 간 재생 수술을 받았다고 했죠. 그때 B는 간을 절반 이상 교체해야 했어요. 술을 원체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한 번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으니 굉장히 엄격하게 절주하는 편이었고요. 저는 어떤 술자리에서도 B가 두 잔 이상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한 잔은 그 자신, 다른 한 잔은 죽은 환자를 위한 추모주라 딱 두 잔까지만 마시는 거라고 하더군요. 이게 가장 놀라운 점인데, 보통 한 번 중독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 재활자들은 다시는 그 특정 물질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중독에서 회복한다는 건 평생 그걸 참는다는 개념에 가깝다고 해요. 회복은 어느 시점에 몸에서 중독 물질이 다 사라지고 나면 중독을 모르던 시절처럼 모든 충동에서 해방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끝을 기다리며 계속해서 시한폭탄을 안고 다니는 것에 가깝죠. 이성이 욕구를 이기지 못하는 어떤 날이 찾아오면. 폭탄이 터지는 거고요.

제가 B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걸 눈치 챈 건 이미 그가 술에 다시 손을 댄 지 한참 지난 후였어요. 그는 처음에는 쉬는 날에만 폭음했다가 나중에는 평일 저녁에도 술을 마셨습니다. 저녁에 마실 술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면 제가 코앞에서 무슨 말을 해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을 수 있었으니까. 눈은 점점 풀려가고 업무 효율은 갈수록 떨어졌죠. 이따금은 말을 걸어도 제때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까지 찌든 술 냄새를 풍기고 다니기도 했죠. 승무원들 사이에서 슬슬 B에 대한 이야기가 오르내리기 시작했을 때,

그가 나타났습니다.

 

13.

 

얘기가 많이 길었죠.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 얘깁니다. 죄송한데 목이 좀 마르네요. 새로 주문하고 마저 얘기를 할까요?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는전술장교였습니다. 저희 S 연합 시스템상 장기 탐사 중에는 일정 기간마다 정박지에 들르게 되어 있어요. 일정한 기간마다 정박 휴가도 줘야 하고요. 폐쇄된 공간 안에서 보낸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거든요. 물론 E는 큰 함선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에요. 업무와 생활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특정 폐쇄 공간 바깥으로 나간다는 행위가 가져오는 스트레스 감소는 무시하지 못할 만큼 크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정박지에 멈출 때마다 임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지휘부 장교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의 20퍼센트를 교체하게 되어 있습니다.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이 교체는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필수 절차 중 하나입니다. 정신 질환을 예방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죠. 그가 E에 탑승한 건 두 번째 기항지에서였어요. 새로운 전술장교 자격으로 부임했었죠. 처음 그가 E에 승선하던 날이 아직도 생각나네요. 함교 전체가 술렁거렸어요. 저도 물론 놀랐고요. 그는, K저를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닮았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그냥 나란히 서서 보면 K의 얼굴은 저와 확실히 달랐습니다. 물론 외형적인 특징은 많이 닮아 있었어요. 그도 금발에 파란 눈이었고, 키도 같았고 체격도 비슷했죠. 하지만 그걸 제외하면달랐어요. 예를 들어 눈 색과 머리카락 색만 해도 K쪽이 좀 더 어둡고무거웠다고 할까요. 금발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꼭 뭔가 한 겹 덮어씌우기라도 한 것처럼 어두운 색이었어요. 눈도 마찬가지고요. 그 생김새가참 말로 표현이 어렵네요. 가만히 두고 보면 전혀 다른 얼굴인데, 뭐라고 할까.

테란의 시야는 180도잖아요. 바로 옆에 누군가가 서 있으면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는 없지만 누가 서 있다는 것 정도는 알죠. 또 꼭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누가 서 있다는 것 정도는 직감적으로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기척이나, 곁눈으로 보는 희미한 생김새 따위로 말이죠. 그런데 K가 그렇게 시야각 끄트머리에 서 있으면 열 중 아홉은 K를 저라고 생각했어요. 똑바로 뜯어보면 다른 사람인 걸 금방 알아차리는데, 똑바로 보지 않으면 저로 보이는 겁니다. 심지어 제 눈에도 그랬죠. 어땠냐고요? 그거야 당연히.

오싹했죠.

 

14.

 

아까 말씀하셨던 제 부함장 말이에요. V행성 출신, S라고 하는. 그 친구는 종족이 종족이라 테란하고는 좀 다릅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지도 않고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지도 않아요. 헌데 그 SK를 보자마자 제일 먼저 했던 게 K의 기록을 확인하는 거였습니다. V행성 출신이 그렇게 행동할 정도였다니까요.

기록에는 당연히 문제가 없었죠. 문제가 있으면 E에 발령이 날 수가 없어요. S 연합은 큰 단체입니다. 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입대하기 어렵죠. 그러니까 이성적으로는 K한테 어떤 문제가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저희 모두 알았어요. 하지만 S를 제외한 나머지는침착하게 반응한 사람이 거의 없었죠. 하물며 S의 행동조차 그렇게 이성적인 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SV행성 출신이라고요!(J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A는 고민 끝에 도수가 약한 맥주를 두 병 추가했다. 바텐더가 내민 맥주병을 받고 나서야 J는 겨우 침착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K가 탑승한 날 K를 본 대원들의 반응이란우주 한복판에서 유령을 봤어도 그런 반응들은 아니었을 겁니다. K를 보고 제가 느꼈던 기분을도저히 설명할 도리가 없네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잖아요. K에 대해 말로만 이야기를 들었던 승무원들이 본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게 무슨 소리냐며 무시했다가 나중에 K를 보고 놀라곤 했어요. 제 말은K이상한 존재였다는 거예요. 대부분의 승무원들은 K를 신기해하거나 좀 어려워했어요. 저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였지만시간이 흐르며 적응한 다른 승무원들과 달리 저는 끝까지 그에게서 이유 모를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도플갱어 효과라고 하던가요, 자기랑 비슷한 존재를 만나면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고 하잖습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저는 함선의 함장이니까 새로 부임해 온 장교에게 티 나게 차별적인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감정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저는 그가 불편했고, 가급적이면 마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K는 저에게 전혀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저를 스스럼없이 대했는데 저는 아니었어요. K가 그러면 그럴수록 혐오감을 느꼈습니다. 마치 불쾌한 골짜기처럼,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사람 흉내를 내는 걸 봤을 때 느껴지는 이상한 찜찜함이 가시지 않더군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저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저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S의 여자친구였던 U, 함교의 조타수인 H, 항법사인 C도 그랬다더군요.

한 명만 빼고요.

 

14.

 

아무리 지독한 악취나 좋은 향기가 진동을 하더라도 좀 지나고 나면 익숙해지는 것처럼 K의 존재 역시 그랬습니다. 불편함을 느낀 건 잠시였어요. K는 붙임성이 좋은 사내였습니다. 쾌활하고 매력적인 데다가 몸을 잘 썼죠. 그는 대원들 사이에 금세 섞여들었습니다. 그는 누구와도 괜찮게 지냈는데 그 중에서도 유별나게 급속도로 가까워진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B였죠.

아까 말씀드렸었죠. B는 처음부터 K에게서 이상을 느끼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고요. 그건 상당히 점잖은 표현이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BK를 처음 봤을 때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습니다. 처음 부임하면 보통 2주 정도는 멘토를 붙여주게 되어 있어요. 그 멘토가 새로 부임해 온 대원이 함선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돕죠. K에게도 멘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B는 굳이 그의 일터인 의료부와는 한참 떨어진 보안부나 격납실까지 가서 K의 식사나 신변잡기를 챙기곤 했습니다. 거기에 따른 K의 태도도 한몫 했고요. B는 잘생긴 편이지만 보통 표정이나 분위기가 험악한 편이라 섣불리 다가오는 사람이 별로 없는 편인데 K는 그렇지 않았어요. 다가오는 B를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죠. 둘은 금세 가까워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B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B를 찾으면BK에게 가봐야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었죠. 저는 그런 B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K와 가까워지고 나서부터 B는 다시 술을 끊었거든요. 눈빛도 예전대로 돌아왔고, 표정도 밝아졌어요.

그 눈이 다시 저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지만요.

A의 이야기

 

거기까지 이야기를 늘어놓고 JA가 주문한 맥주를 급하게 들이켰다. 술이 흘러 웃옷을 적셨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A는 가만히 J를 살폈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한 것 같았지만 J는 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술이 깰 만한 걸 좀 드시는 게 어떻겠소.

J는 한참 침묵한 후에 대꾸했다.

아니오. 마저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밤이 아니면 이런 미친 이야기를 다시 털어놓을 용기가 날 것 같지 않거든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A.

AJ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을 대로 하시구랴.

J의 이야기

 

15.

 

제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 K가 함선에 탄 지 석 달이 넘어가던 무렵이었습니다. 처음 이야기를 꺼낸 건 S였어요. 일과 후에 저한테 조용히 할 이야기가 좀 있다더군요. S가 그런 식으로 저한테 따로 시간을 요청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어서 알겠다고 했습니다. 빈 회의실에서 S가 꺼낸 얘기는K에 대한 거였어요. K의 기록이 뭔가 이상하다는 얘기였죠.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S는 첫날 K의 기록을 S 연합 중앙 데이터베이스에 요청해서 내려받았습니다. 표면적으로 그의 기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2년 전에 입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적으로 아카데미를 월반한 천재였죠. 본래 그렇게 뛰어난 성적의 고급 전술 장교는 탐사 같은 임무에는 잘 배치하지 않아요. K 본인의 강력한 요청이 아니었다면 그가 E같은 장기 탐사 임무에 배치될 일은 없었겠지요. S가 이상을 느낀 부분은 그의 아카데미 성적이었습니다. 정확히는 특정한 테스트에 대한 결과였죠.

S 산하 아카데미에서는 2200년대 초반에 제 부함장인 S가 설계한 테스트를 도입했습니다. 함선을 지휘하게 될 예비 함장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맛보게 하고, 선원들을 지키지 못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느끼게 하기 위해 고안한 테스트죠. 흔히 말하는 노-윈 시나리오입니다. 그 테스트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깰 수 없었어요. 최초로 테스트를 격파한 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요. 그 테스트를 최초로 깼던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공정한 방법은 아니었어요. 약간의 편법에 호소했죠. 절대 이길 수 없는 상황 따위가 존재한다는 걸 부정하고 싶었거든요. 저는 G 테스트를 승리로 끝냈지만 편법을 사용한 게 적발되어 정학을 받았어요. 차후에 테스트의 고안자였던 S가 모종의 사건으로 제 부함장이 되면서 테스트의 내용이 다소 수정되었죠. S는 저항이 불가능한 절망적인 상황 안에 생도들을 몰아넣고 다가오는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테스트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제 비난을 존중했죠. 그에 따라 그 테스트소위 G 테스트라고 부르는는 아카데미에 도입된 지 여덟 해만에 파해 가능한 시나리오로 변경되었습니다.

S가 주목한 건 KG 테스트 수행 결과였어요. K는 그 테스트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습니다. 결과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어요. 문제는 테스트를 통과한 방식이었죠. K가 테스트를 통과한 방식은 이미 이전에 쓰였던 거였습니다. 제가 테스트를 통과했던 방식이었죠. 충분히 파해 가능한 시나리오였음에도 불구하고요.

 

16.

 

하나가 이상하면 다 이상하다고. K의 성적을 뜯어보기 시작하자 찜찜한 점은 금세 더 발견됐습니다. K가 월반해서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한 천재였다고 말씀드렸었죠. 저는 K와 비슷하게 우수한 성적으로 아카데미를 조기에 졸업한 사람을 한 명 더 알고 있었습니다. K의 성적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우수한 과목은 고급 전술 훈련 과목이었는데, 만점으로 고급 전술 훈련 과목을 수료한 생도는 S 산하 아카데미가 설립된 이후로 단 두 명뿐이었어요. 저와, 그리고 K였죠.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게 너무나 흡사했어요. 제가 재학 중에 받았던 성적표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습니다. S는 처음에는 테스트의 결과에 주목했다가 나중에는 성적표의 성적이 구성하는 양상에 의문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S의 말대로였어요. 이상했죠. 사실 많이요. 저는 S에게는 우연의 일치이니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했습니다. S는 석연치 않은 눈치였지만 제 의견을 존중했죠. 하지만 그게 우연의 일치일 리가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어요.

그 즈음에 저는 BK와 사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17.

 

K는 빠르게 함선에 적응했어요. 처음에는 저와 너무 닮은 인상 때문에 K에게서 이상함을 느끼던 대원들도 금방 K와 잘 어울리게 됐죠. 아까도 말했지만, 매력적인 남자였습니다.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데다 놀라울 만큼 머리가 좋았죠. 그가 그때까지 함장이 되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요. 그는 직책상으로는 고급 전술 장교였지만 실제로는 기술부 업무분장이나 보안부의 업무분장에 대해서도 세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함교를 목표로 하지 않는 이상 보통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하는 생도들은 타 부서의 업무분장까지 익히지는 않아요. 하지만 K는 그렇더군요. 마치 자기 함선을 가져본 사람 같았어요.

어쩌다가 우연히 K가 일하는 걸 지켜보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시뮬레이터를 가지고 가상 전술 모의 훈련을 진행 중이더군요. 저는 그에게 제가 보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가 모의 전투에서 명령을 내리는 걸 보고 있었죠. 그의 전술 운용은놀라울 정도로 저와 흡사했습니다. 제가 나라면 이렇게 움직일 텐데하고 생각한 시점에 제 생각과 같은 명령을 내리는 식이었어요.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요. 중반까지 지켜보다 마음이 불편해져 자리를 떴는데, 나중에 모의 전투 결과가 궁금해져 확인해보니 적기를 몰살하는 방법으로 전투를 종료했더군요. S 연합에서는 보통 그런 식으로 전술 운용을 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개인적인 불편함 때문에 저는 가급적 K와 마주치는 일을 피했지만사이에 B가 있었기 때문에 B를 찾다보면 K와 예기치 않게 맞닥뜨리곤 했습니다.

BK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금방 알았어요. 예전에 저를 보던 눈으로 K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런 B를 볼 때마다 얼마나 속이 안 좋았는지 모릅니다. B에게 형편없이 굴었던 게 부끄럽고 미안하면서도 B가 그런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본다는 게불쾌했어요. 또 누굴 나처럼 만들 작정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어쨌든 K는 꽤 매력적인 남자였고 보통 그런 사람은 주위에서 가만히 두지 않거든요. 그래서 전 내심 K가 빨리 다른 상대를 찾길 바랐습니다. 그러면 B도 다시 정신을 차릴 거라고 생각했죠.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건KB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어요. B 역시 충분히 누군가에게 사랑받을만한 사람이었는데. 저는 그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겁니다.

 

18.

 

B가 나아지길 바랐던 것도 사실이고 저는 B를 친구 이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B가 마침내 서로 마음이 통한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는 걸 기뻐하고 축하해줬어야 했는데.

 

19.

 

그럴 수가 없었어요.

 

20.

 

조금도 기쁘지 않았거든요.

 

A의 이야기

 

J는 말을 멈췄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A는 한 자세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듣느라 굳어진 허리를 폈다. 문득 그는 아까보다 주위가 많이 조용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A는 가게 내부를 돌아보았다. 비좁은 술집을 채우고 있는 손님은 채 열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A는 시계를 확인했다.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는 다시 J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많은 잔을 비운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창백한 얼굴이었다.

괜찮소?

JA에게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창백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눈길을 잡아끄는 미모는 그대로였으나 뭔가가 한 꺼풀 죽은 것 같은 미소였다. AJ가 전지가 다해 가는 손전등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가물거리며 힘겹게 마지막 빛을 내뿜다가 어느 순간 어둠에 매몰되어버리고 마는 청백광의 등불.

J가 눈을 내리깔았다.

괜찮습니다. 마저 들어주시겠습니까? 시간이 너무 늦은 게 아니라면요.

A는 잠시 내일의 근무와 눈앞의 위태로운 남자를 저울질하다가 바텐더에게 손짓을 했다.

두 잔 더 추가해 주시오.

그리고 그는 젊은 손님의 팔을 가볍게 건드렸다.

계속하시오.

J의 이야기

 

21.

 

얼마나 번민했는지 모릅니다. 몸이 둘로 찢어질 것 같았어요. 아침에는 오늘에야말로 B를 만나서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건네고 둘의 앞날을 축복해주자는 생각을 했다가 밤이 되면 당장 B를 찾아가서 정신을 차리라고 윽박질러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제 마음은 운석지대를 만난 함선 같았어요. 그런 곳에서는 아주 작은 실수가 함선 전체를 갈기갈기 찢어놓죠. 저는 KB와 같은 마음으로 B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계속, 계속해서 머리 한 구석에서 누군가가 속삭였어요. 저 불쌍한 K를 보라고. BK에게는 너에게 했던 짓을 반복하지 않을 것 같으냐고. 그를 구하기 위해 B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네가 충고를 해 줘야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맞아요. 좀 이상하게 들리죠. 유감스럽게도 당시 저는 제 사고가 비정상적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어요.

저는 그 목소리대로 K에게 충고를 건네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했던 일들 중 유일하게 잘한 일이죠. 하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K가 싫었습니다. 말도 붙이고 싶지 않을 만큼. K는 그렇지 않은 듯 저에게 꽤 살갑게 굴곤 했지만 그의 그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K에 대한 제 거부감은 명확했어요. K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그냥 불편함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혐오스러운 것, 이를테면 열 살도 안 된 어린 아이가 침대에 누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섭고 끔찍한 침대 밑 괴물 같은 것들 말이에요.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나 느껴질 법한 생리적인 혐오감과 불쾌감을 저는 항상 K에게서 느꼈습니다. K가 가까이 올 때면 털로 뒤덮인 다리가 서른 개 넘게 달린 검은 타란튤라 거미가 앞을 스쳐지나가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어요. 결과적으로 제가 그 둘에게서 느꼈던 이상한 감정은 전부 B에게로 향했죠.

 

22.

 

BK는 아주정석적인절차를 밟아 데이트를 시작한 경우였어요. 그냥 물 흐르듯 주변사람들 모두가 알게 되는 사이 말이에요. B와 원래부터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은저를 제외하고모두 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이를 눈치챘습니다. 데이트 한 번, 점심식사 여러 번. 다시 저녁 약속에서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지는 그런 데이트들이 착실하게 이어졌죠. 저는 그 둘의 관계가 제법 깊어진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알기 전에는 눈에 보여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깨닫고 나면 갑자기 슬로우 모션처럼 눈에 크게 들어와 박히는 경우가 있죠. 제 눈에 보인 그 둘의 관계도 그랬습니다. 그 전까지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던 모습들, 복도나 휴게실. 혹은 식당에서 함께 있는 BK의 모습을 발견하거나B의 표정이 이전에 저를 볼 때와는 달리 편안해 보인다는 걸 깨닫는 순간마다 차마 말로는 못 할 만큼 난폭한 기분이(J는 어깨를 들썩이며 메마른 웃음을 뱉었다.)들었죠.

아까 말씀드렸었죠? B가 저를 위해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적이 있다고. 제 치료에 관련된 일이었는데B가 한 일 때문에 저에게 부작용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더군요.

저는 B를 불러 제가 이상해지고 있다고 했어요. B는 매우 놀라더군요. 그리고 제게 어디가 어떻게 이상해지고 있다는 건지 말해보라고 했어요. 그는 저를 의자에 앉히고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았습니다. 그리고 제 손을 강하게 쥐었죠.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요. 지금도 걱정스럽게 저를 들여다보던 B의 목소리가 선명해요. J, 무슨 일이야. 다 털어놔 봐.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그 걱정 가득한 B의 표정이맙소사. 그걸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요. 미칠 것 같았어요. 이제는 절 신경 쓰지도 않으면서, 관심사는 오로지 K 뿐이고 사실은 저를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면서둘도 없는 친구인 양 저를 걱정하는 척 연기하는 얼굴이 가증스럽고 화가 났습니다. 저는 떠오른 말을 그대로 그에게 퍼부었어요. B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자 기분이 조금 좋아지더군요.

B는 여러 가지 검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다 정상이라고 했죠. 하지만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어요? B는 저에게 K에 대해서도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았는데요. 저는 B가 절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차마 말로는 못 할 결과가 나와서 저지른 일을 덮기 위해 저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저는 떠오른 의심을 거르지도 않고 그대로 B에게 내뱉었습니다. 부인하는 B를 집요하게 추궁하고 반복해서 강박적으로 재검을 요구했죠. 절 속이지 말라고, 사실대로 말해 달라고요. 그게 결과적으로 BK를 더 가깝게 만들 줄 모르고.

 

22.

 

제가 B를 붙들고 난리를 치는 동안 뒤에서 B는 저와의 사이에서 겪는 어려움을 K에게 털어놓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반대가 된 거죠. 저에게는 더 이상 탈출구가 없었는데B에게는 모든 일을 털어놓고 기댈 수 있는 남자친구가 생겼어요.

알아요. 제가 좋은 친구는 아니었죠. B와 제 관계에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요. B는 제 친구였잖아요. 절대 저에게 등을 돌리지 않겠다고 약속했고요. 제가 그렇게 힘들게 했을 때도 절 등지지 않은 주제에 정작 그게 다 끝나고 나니까 저와 멀어지려 드는 게 저한테는 마치배신처럼 느껴졌어요. (J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약간 쉬어 있었다.) B가 보낸 시간들을 고려하면 B에게 좋은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B가 절 떠날 거란 사실을 알았을 때그때 기분은…….

……미안합니다. 이 얘기는 넘어가는 게 좋겠네요. 모르는 상대라 안심하고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맞지만 인간에겐 누구나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잖아요.

 

23.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사과드리겠습니다. 거의 다 끝났어요. 진짜 끝은 아니지만.

B는 저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K에게 말했어요. 그게 당연하겠죠. 남자친구란 그런 거잖아요. KB에게 둘이 계속 붙어 지내는 건 서로에게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B를 설득했습니다. B는 망설였죠. 제가 말했던가요? B를 이루는 건 절반 이상이 책임감이었다고. B는 선뜻 K의 말에 응하지 못했어요. B의 눈에 저는 아직 상태가 불안정한 환자였고, 그의 남다른 직업윤리는 환자를 포기하고 떠나는 데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B는 꽤 오래 고민했어요…… 제법 오래, 저와 계속 함께 있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다는 K의 말이 맞는다고 느낄 정도로 충분한 시간을요.

그 시간은 B가 저에게 준 마지막 기회였는데, 저는 그걸 몰랐죠.

 

24.

 

둘은 다른 함선으로 배치 신청서를 냈어요. 그리고 약혼을 했죠. 하하. 약혼이라니. B가요. 제가 말했었죠, B는 한번 다녀왔다고. 한 번 결혼에 실패했던 탓에 B는 관계에 엄청나게 겁이 많았어요. 제가 눈치채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로 평생 저에게 고백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누굴 만나든 곁에서 덤덤하게 축하하면서계속 좋은 친구로 남았겠죠. B는 관계를, 더 정확히는 또다시 실패할 걸 병적으로 두려워했어요. 저와 만났던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관계를 시도하지 않은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을 겁니다. 그런 B가 결혼을 약속한 거예요. 그것도 만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남자와.

 

25.

 

도대체 그와 저의 다른 점이 뭐였을까요.

 

26.

 

이 이야기에 불안한 반전 같은 건 없어요. 저는 둘의 전환 배치 신청서를 승인했습니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런 순간에조차 제대로 행동하지 않을 수는 없었죠. 어느 날 아침에 패드에 뜬 신청서에서 B의 이름을 봤을 때 느낀 기분은찬물벼락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해두죠. 갑자기 모든 게 분명했어요. 마치 평생을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던 사람이 기적적으로 깨어난 것처럼한 겹 막을 씌운 것처럼 불투명하고 이상하게 느껴지던 것들이 순식간에 맑게 개었습니다. 그 때에야 알았어요. 아주 선명하고 뚜렷하게,

B가 절 버린 게 아니라 제가 B를 잃었다는 사실을요.

 

27.

 

둘이 다른 함선으로 옮겨가기까지 또 3개월 정도가 소요됐습니다. 둘은 각자의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후임자를 교육했어요.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나면 어떻게 지낼지 의논하는 모습을 휴게실에서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딱 붙어 앉아 이마를 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BK를 마주칠 때면.

아니, 아니오. 이 얘기도 넘어가죠. 저는 오늘은 가급적 전적으로 솔직하고 싶거든요. 솔직하기 위해서 모든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죠. 특히 그게 별로 아름답지 않을 때는요. 그냥B는 행복해 보였어요.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였죠. 저는(J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A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끄집어냈다. 그는 그걸 J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아니, 아니오. 괜찮습니다. 넣어두세요. 중요한 물건 같은데.(아니, 받아두시오. 당신이 더 필요할 것 같소. A는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추태를 보여서 죄송합니다. 제 얘기는 이게 다예요. 말씀드린 대로, 불안한 반전 같은 건 없어요. 그 둘은 남아있던 기간 동안 평화롭게 생활하다가날짜가 되어 E를 떠났습니다. 그게 끝이고, 그리고 이 좆같은 이야기의 시작이죠. 제가 아까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랬었죠.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해 중이긴 한데 어디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요.

 

28.

 

E를 떠난 직후 BK는 사라졌어요.

 

29.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30.

 

추리물이나 스릴러를 남에게 들려줄 때는 법칙이 있죠. 화자가 반드시 범인이 사용한 트릭을 간파하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정교한 설명이 가능하고해답을 낼 수 없는 방정식을 문제로 내는 건 반칙이니까요.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의 답을 저는 모르고 있거든요. 사실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 파악조차 못 하고 있어요. B를 찾아야 하는데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혹은 단서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조차도요.

*

 

A의 이야기

 

술잔을 만지작대는 J의 손이 불안하게 떨렸다. A는 슬그머니 어깨 너머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이제 남아있는 손님은 그와 J, 둘뿐이었다. 검약이 몸에 밴 바텐더가 손님이 없는 홀의 조명을 모두 꺼버려 등 뒤의 가게는 어둠에 잠긴 바다 같았다. 바를 비추는 조명만이 그 망망대해에서 엷고 불안한 빛의 커튼을 AJ의 어깨 위로 덮고 있었다. 그 반쪽짜리 커튼이 사라지면 등 뒤까지 밀려온 어둠이 그들을 당장 쓸어갈 것 같다는 불온한 상상이 치솟아 A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본래 이렇게 감상적이었던 적이 없는데 왜 이런 불길한 이미지가 연상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J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랜 시간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한 탓에 J의 목소리는 탁하게 쉬어 있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요?

K. K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이제 완전히 불이 꺼진 전등처럼 넋이 나간 듯한 청년의 시선이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허공을 헤맸다. 지친 듯 J의 얼굴에서는 어떤 빛도 찾아볼 수 없었다. A는 저도 모르게 머리 위로 내리쬐고 있는 조명에 흘긋 시선을 던졌다. J가 더 이상 빛을 내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다른 빛을 확인해야 한다는 미신 같은 생각이 잠시 머리를 들었다가 사라졌다. A는 스스로의 생각에 헛웃음을 흘렸다.

J가 말했다.

함선에서 내리기 직전, K가 마지막으로 저를 찾아왔었어요. 단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K와 독대하는 건 제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지만어쨌든 그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이 될 사람이었고 거절할 명분이 없더군요. 저와 K는 격납고의 셔틀 사이를 걸으며 짧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K시답잖은 얘기들을 했어요. 앞으로 어떻게 지낼 건지. 둘이 어떤 생활을 할 건지그런 것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저는 잠자코 들었습니다. K와 말을 섞느니 조용히 들어주고 빨리 보내는 게 낫다고 판단했거든요. K는 저 좋을 대로 한참 이야기를 늘어놓더니그만 가보겠다며 제게 인사를 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렸어요. K1초도 더 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 순간 K가 그러더군요.

내가 누군지 여전히 모르겠냐고.

J는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거칠게 눈을 비볐다. A는 손을 내저어 그런 J를 만류했다.

이런, 그만두시오. 그렇게 문지르면 눈이 상하외다. 손수건을 적셔서 닦는 편이.

돌아봤을 때 K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A는 말을 멈췄다.

사라졌단 말이오?

아마 바로 전송실로 갔던 거겠죠. 몇몇 승무원들이 BK의 전송식을 하느라 전송실에 가 있었거든요. 그들은 BK가 인사를 하고 제대로 전송되어 갔다고 증언했어요. 그러니까 K는 유령이나 뭐, 그런 건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둘은 사라졌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어요. 저는 여전히 둘을 찾고 있지만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찾을 수는 있을지. B사라진 채인 게 행복할지. 찾는 게 옳은 일이긴 한 건지.

J는 다시 한 번 눈을 거칠게 문질렀다. 흰자위에 새빨갛게 핏발이 섰다. 바 안 쪽에 서 있던 바텐더가 헛기침을 했다. 영업 종료 시간을 한참 넘겨서까지 앉아있는 손님들에게 보내는 점잖은 축객령이었다. A는 당황해 스툴에서 내려섰다. J 역시 조금 비틀대며 땅에 발을 디뎠다.

그만 돌아가 봐야겠군. 괜찮소?

괜찮습니다. 제가 너무 오래 시간을 뺏었군요.

신경 쓸 것 없소. 누가 이런 늙은이 말상대를 이렇게 오래 해 주려고 하겠소? 내가 신세 진 셈이지. 이제 그만 갑시다. 너무 오래 있었구려.

J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크레딧 칩을 꺼내 바 위에 올려두었다. 얼핏 보기에도 팁이 상당한 금액일 것 같았다. 저 정도면 깐깐한 바텐더도 만족하리라. AJ를 가볍게 재촉해 가게 문으로 향했다. J가 가게 문턱을 넘은 순간 바텐더가 A를 불러 세웠다.

A. 죄송합니다만 잠시만요.

무슨 일이오?

이거 가지고 가십시오. 지난 주말에 C씨가 A씨 생일 선물이라고 보관 맡기신 건데 대화 도중이셔서 전달을 못 해 드렸네요.

바텐더가 바 위에 묵직하게 포장된 긴 꾸러미 하나를 내놓았다. 다시 어두운 홀로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바텐더에게 더 이상 밉보여 좋을 것도 없었다. 앞으로도 쭉 여길 와야 했으니. A는 잰걸음으로 황급히 어두운 홀을 가로질러 바에 도달했다. 꾸러미를 쥐고 나서야 그는 바 위에 자신이 아까 J에게 건넸던 손수건이 그대로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A는 손수건을 챙길까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J에게 준 선물이었다. 이미 그의 손을 떠난 물건이라면 그 행방은 운명에 맡기는 게 마땅하다.

꾸러미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서려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A는 고개를 돌렸다. 언제 홀을 가로지른 건지 J가 소리 없이 돌아와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바 위에 놓인 손수건을 집었다. A와 눈이 마주치자 J는 싱긋 웃었다. 아까와 달리 활기 넘치는 미소였다. 밤의 도입부에서 가게를 둘러봤을 때 A가 목격했던 바로 그 남자와 같은 빛이 돌아와 있었다.

이걸 놓고 가서요. 기왕 주신 선물인데.

, 맞소. 자네에게 준 물건이니 가져가시오.

A는 자신이 왜 말을 더듬는지 알 수 없었다. J는 보기 좋은 미소를 띤 채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갑자기 똑똑, 작고 또렷한 소리가 나서 AJ는 동시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권태로운 표정의 바텐더가 옷까지 갈아입은 채 바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폐점합니다.

, 이런. 실례했소. 그만 나갑시다.

AJ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돌아섰다. 등 뒤에서 훅, 바 위를 비추던 조명이 꺼졌다. 실내가 순식간에 어둠에 잠기자 A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나는 걸 느꼈다. 센타우리 A는 지구의 늦가을 날씨와 흡사한 기온이 항시 유지되는 곳이었지만 A는 겨드랑이와 등줄기를 타고 땀이 배어나는 걸 느꼈다. 이마와 두피 속에서도 미지근한 진땀이 솟아나고 있었다.

어둠이 일렁이는 바다에 잠긴 채 가게 입구를 향해 걸으면서 J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영감님은 정말 친절하신 분입니다. 보통 이런 얘길 들어주는 사람은 잘 없어요. 너무 길고, 결말도 형편없으니까요.

별 말을 다 하오. 나는 꽤 흥미롭게 들었소이다.

추리를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저희가 얘길 시작한 것도 추리 때문이었죠.

맞아요. 별로 잘하진 못하지만.

얘길 들어주신 답례로 흥밋거리를 하나 더 드리고 싶군요.

빛나는 사각형 테두리처럼 보이는 가게 입구가 가까워졌다. 익숙한 감촉의 문손잡이를 쥐자 밀물처럼 안도가 몰려들었다. 등 뒤에 선, 유령처럼 기척 없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를 들은 순간 A는 어째서인지 J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입을 벌린 채 활짝 웃고 있을 거라고.

아까 들려드린 이야기 속에서 저는 KB와 했던 이야기를 언급했죠.

그랬었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A는 뒤돌아섰다.

뭐라고 했소?

어둠 속에서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만 A의 말에 대꾸했다.

저는 K를 피해 다녔다고 말씀드렸죠. 말도 섞기 싫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고요.

A의 머릿속에서 J가 했던 이야기들이 천천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J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 제가. B와의 관계가 최악이었던 제가 둘 사이에 오간 계획과 이야기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무슨, 말을 하는 거요?

J가 대꾸했다.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벨벳처럼 매끄럽고,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그런 목소리.

조금 더 직접적인 힌트를 드릴까요. A.

. 숨소리가 어둠을 건너 A에게 닿았다. A는 이제 어둠 속에서 J가 짓고 있을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귀에 입이 걸릴 만큼 찢어지게 웃고 있는 얼굴. J가 속삭였다. 그의 말이 비단구렁이처럼 어둠 속을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제가 누굴까요?

A는 뒷걸음질쳤다. 그의 머릿속에 갑작스럽게 셔틀의 헤드라이트가 들이닥치듯 어떤 장면이 펑 터졌다. J가 바 위에 놓여 있던 손수건을 집어들던 순간이었다.

그 손은 조금도 떨고 있지 않았다. A가 거의 숨이 멎을 듯한 공포에 질려 가게 문을 밀어젖혔다. 싸늘한 바람이 가게 안으로 밀려들어 A의 코트 깃을 날렸다. 가게 밖, 가로등 불빛이 가게 안으로 쏟아져 내부를 어렴풋이 밝혔지만 J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A는 두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꾸러미도 잊은 채 인적 없는 밤거리를 정신없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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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엔딩이므로 미러짐/본즈인지 짐/본즈인지 명기하지 않았습니다.

결말부의 스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NTR 요소를 명시하지 않았습니다.